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꽃이 아름다워서 슬프다고 노래한 건 김윤아(봄날은 간다)였다. 그보다 오래 전 슬퍼서 아름다운, 지는 꽃을 일러준 이는 조지훈 시인(낙화)이었다. 지는 꽃에 대한 시인의 이 지극한 헌사는 고교 시절 수험생의 깡마른 감성을 가만히 떨게 했다. 2003년 한 정객이 <낙화>의 첫 구절을 수감의 변으로 삼아 정치의 가벼움을 새삼 드러냈지만,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야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던 시인의 정한은 티끌만큼도 손상하지 못했다.
피는 건 오래여도 지는 건 잠시라더니, 난만하던 개화 소식이 엊그젠데 벌써 천지간에 낙화 소식뿐이다. 섬진강변의 매화가 흩어지더니, 토담 옆 살구꽃도 무너져 내렸다. 선운사 늦동백이 우르르 떨어지자, 노란 개나리도 녹엽으로 바뀌었고, 거리의 벚꽃이 바람에 사라지자 산의 진달래도 파란 하늘로 올라갔다. 라일락 향기 동네 골목에 자욱하지만, 이제 봄은 꽃 지는 계절이다.
환화(幻化)라고 있다. 실체가 없는데 실재인 양하는 것이다. 허깨비다. 욕망과 집착이 빚어낸 환청이고 착시다. 불가에선 돈과 명예와 애욕 등 인간이 집착하고 바라는 것을 모두 환화라 일렀다. 이매망량이라고도 한다. 산도깨비(이), 집도깨비(매) 그리고 나무나 물의 도깨비(망량)를 뜻한다. 원망·기대·공포 등 사람의 마음이 지어낸 망상이다. 이것을 불행의 근원으로 본 까닭에 부처님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가르쳤다.
한때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와 인권, 도덕과 정의의 정치를 이야기하고 추구했다. 생명과 공의를 짓밟은 전두환도 정의사회를 시정 목표로 삼았고, 노태우는 보통사람의 시대를 표방했다. 그러나 이제 가치의 정치는 사라지고, 욕망의 정치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치는 유권자의 욕망을 자극하고 부추기고, 그래서 환화를 지어내도록 하는 것으로 득표를 한다. 1%만이 성공할 수 있는데도 국민 성공시대를 표방하고, 단 10%가 우리 사회의 돈을 틀어쥐는데도 모두 떼돈을 벌 수 있는 것처럼 떠벌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래서 지난 두 번의 선거엔 돈과 성공의 환화가 만개했다.
그러나 환화는 허깨비. 선거가 끝나자 공돈의 기대로 들뜨게 했던 뉴타운은 꺼져 버렸고, 국민 성공을 보장하리라던 새 교육제도는 강자와 부자를 위한 정글로 드러났다. 약속했던 20대의 안정된 일자리는 신기루처럼 멀어지고, 기대했던 노년의 품위는 연금 삭감, 의료보험 민영화로 최소한의 건강조차 기약하기 어렵게 됐다. 농축산 농가의 일자리와 소득은 고스란히 미국의 농축산 농가에 헌상됐고, 그 희생 위에서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된단들 농업의 몰락은 가속화하고, 의료·약·금융·법률 산업은 위태롭다. 성공 신화에 들떠 있던 샐러리맨들의 일자리는 더욱 불안정하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랴. 미국 대통령의 칭찬 몇 마디에 넋이 빠져, 온갖 지급 청구서를 떠안고 돌아 온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선택한 건 자신이었다. 정치꾼이 던진 몇 마디 공치사에 으스대고, 그들이 내민 몇 가지 청사진에 속아 계급적 기반과 이해를 저버리고, 환화에 놀아난 건 자신인데.
시인이 아니더라도, 꽃이 지는 아침엔 울고 싶다. 하지만 꺼져가는 환화 앞에선 환멸만 쌓인다. 만천하에 드러난 너절한 욕망과 집 착, 터무니없는 착각과 오만이 수치스러울 뿐이다. 환화가 꺼져가는 이 아침, 먹은 것도 없는데 딸꾹질만 나온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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