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논설위원
권태선칼럼
“정상들의 일본 방문 때마다 한두 달 전부터 사과 수준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어떤 단어를 쓸 것인지를 놓고 협상을 했다. 너무 소모적이다.” 취임 후 첫 외국 순방을 앞둔 자리에서 나온 이명박 대통령의 이 발언은 “역사의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 언제까지나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가는 길을 늦출 수는 없다. 한국과 일본도 서로 실용의 자세로 미래지향적 관계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고 한 삼일절 경축사와 함께 그의 대일 실용외교의 진면목을 담고 있다. 청와대 고위당국자가 이번 한-일 정상회담의 핵심이라고 밝힌 경제협력을 위해선 과거사 따위는 눈감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이 대통령의 주장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일찍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도 취임 초기에는 비슷한 주장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납치되는 등 고초를 겪은 자신야말로 한-일 새 시대를 열 적임자라며, 1998년 한-일 정상회담에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오부치 게이조 당시 총리의 사과발언을 수용하고 더는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4년 정상회담에서 “제 임기 동안에는 한국 정부가 한-일 사이 과거사 문제를 공식적인 의제나 쟁점으로 제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과거사에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정부가 공식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제 인식”이라고 밝혔다.
한국 쪽의 이런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다름아닌 일본이다. 김 대통령 당시에는 연이은 각료들의 망언으로, 노무현 정권에서는 과거사를 왜곡한 우익교과서와 독도 영유권 주장, 그리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을 통해 일본은 역사문제를 양국 관계의 주역으로 복귀시켰다. 이렇듯 광복 60년을 훌쩍 넘어서까지 한-중-일 사이에 역사 인식논란이 종식되지 못한 채 계속 재연되는 이유는 역사가 현재 속에서 미래까지 내다보며 재해석되는 과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의 역사인식을 문제삼는 것도 그것이 일본의 미래,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미래와 관련되어서다. 이 대통령의 의지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다.
최근 일본에서 발간된 아키다 히로유키의 <암류>(暗流)란 신간을 읽다가 흥미로운 일화를 발견했다. 노 전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역사인식 문제를 어찌나 강력히 비난했던지 미국 정부 내에서 한-중-일 역사 갈등에 침묵을 지키는 미국의 태도에 의문이 제기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차관보는 일본 기자들이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의견을 구하자 “아시아의 역사문제가 해결됐으면 하는 강한 바람이 있다. 유럽에서도 불행한 역사로 인한 문제가 많지만, 어려운 문제는 제쳐두고 통합으로 나아갔다”고 말한 뒤 “나는 초등학교 선생이 아니어서 타인에게 조언을 하고 싶진 않지만 성숙한 사람답게 스스로 결단해야 할 것”이라며 우회적으로 참배를 비판했다. 노 전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과 중국의 강한 문제제기가 없었더라도 미국의 이런 태도 변화가 있었을까?
과거에 잡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미래를 핑계로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덮어 버리는 것도 능사는 아님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후나바시 요이치 일본 <아사히신문> 편집위원의 말처럼 아직도 세계는 역사를 왜곡하려는 움직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권태선 논설위원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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