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이 후보의 당선만으로도 연간 경제성장률이 최소한 1~2% 포인트 높아질 것”이라고, 한 참모가 말했을 때만 해도 그저 한번쯤 딸랑대는 소리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관람한 뒤 그가 직접 했다는 말을 듣고는 ‘이건 아니다’ 싶었다. “오늘 제가 온 걸로 해서 관객이 100만명 이상 더 늘었으면 한다.”
구질구질하게 말꼬리 잡으려는 건 아니다. 지난 5년간 대통령의 말 때문에 겪어야 했던 혼란을 걱정해서 하는 소리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언어는 인식과 사유, 의미와 가치의 원천이라는 말일 게다. 이것을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철학자나 시인에게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정치인에게 언어는 정치행위 자체이고, 리더십의 원천이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와 사법부 언론을 장악한 수구파들의 저항을 오로지 노변정담이라는 국민과의 대화로 극복했다. 히틀러는 민족적 망상을 자극하는 구호와 요설로 독일 국민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다.
‘대통령 노무현’을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그의 거침없는 말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를 따돌림당하게 한 것도 그의 막가는 말이었다. 대통령 후보 시절 그가 “남북관계만 성공시킨다면 다른 건 깽판 쳐도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표현의 솔직함에 오히려 호감이 갔다. 그러나 취임 직후 검사와의 대화에서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라고 말할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취임한 지 불과 석달 만에 “이러다가는 대통령 못 해먹겠다는 감이 든다”는 말이 나오면서 그의 말은 독침이 되었다. 민원부서 공무원들 앞에서는 “개○○들, 절반은 잘라야 한다는 말이 민원인들 입에서 나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백범 김구 선생처럼 실패한 정치인이 되지 않고 싶다’고 했지만, 이 소망은 바로 그의 말 때문에 이뤄질 수 없었다.
이명박 당선인도 거침없기로는 노 대통령 못지않다. 후보 시절 ‘빈둥대는 노동자’라거나 ‘마사지걸 고르는 법’ 따위의 말을 뱉었다가 혼쭐나기도 했다. 표현이 문제였던 노 대통령과 달리, 그의 말은 근거 없는 자기확신이나 잘못된 인식 등 내용이 문제였다. 그는 일쑤 “학교 공부만으로도(혹은 영어 과외를 받지 않아도) 아이들이 대학에 갈 수 있게 하겠다”라거나 “조기유학의 원인은 한국 교육이 돈은 많이 들지만 수준은 낮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도 누구나 대학에 간다. 문제는 ‘특목고에 진학해, 명문대를 졸업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고 싶은’ 학생과 학부모의 열망에 있다. 조기유학생 대부분이 택하는 미국 사립학교의 등록금은 우리보다 수십배 비싸고, 교육의 질도 한국보다 높지 않다.
여성부 해체와 관련해선 “조사 통계를 보니 여성부는 여성 권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부서”라거나 “여성을 상대로 투표해 보면 여성부 없애라는 것이 훨씬 많다”고 주장했다. 근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통일부 해체 방침을 밝히며 “이제 남북문제도 통일부와 북쪽의 통일전선부가 수군수군 밀실에서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했지만, 막후 협상은 통일부가 아니라 국정원이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국정원을 없애야 한다.
대통령이 되면 말부터 는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정보가 가장 많고, 그 앞에선 누구나 말을 주저하는 탓이다. 큰 귀를 자랑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도 취임 뒤엔 입만 보였다고 한다. 그 전철을 밟지 않기를 빈다. 말을 빛내는 것은 신중함과 절제다. 허튼 말은 존재의 무덤이 된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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