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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칼럼] 어떤 사랑에나 진실은 있다

등록 2007-09-16 17:50수정 2007-09-16 17:53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그때 나는 천박했다. 설사 범죄자라도 반드시 보호받아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말초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그들의 인격과 내밀한 감정과 비밀을 모두 까발리고, 조롱했다. 국방사업을 팔아먹은 국방장관이었고, 뚜쟁이질을 한 게 현직 장관과 국회 국방위원장 그리고 장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자였으니 얼마나 신이 났던가.

연서, 그것은 타인과 나누는 가장 내밀한 소통수단이다. 거기엔 오로지 수신자에게만 드러내는 감정이 있고 고백이 있다. 사기꾼의 것이라도 일말의 진정성이 담긴다. 세상은 거기에 사회적 규범을 들이댈 이유도 권한도 없다. 그로 말미암아 배반감을 느끼고 상처를 받았을 가족이라면 모를까. 그가 전직 장관에 국회의원이었다고, 도대체 “사랑하는 00에게, 산타바버라 바닷가에서 아침을 함께 한 그 추억을 음미하며 …”로 시작하는 편지를 들춰내고 침을 뱉을 권리가 어디 있는가.

기왕에 훔쳐봤다면, 나는 그들의 고백 속에서 최소한의 진실을 느껴야 했다. “우리가 20대라고 했으면 어떨까 하고, 가정을 해보았소”(ㅈ씨) “안아보고 싶소”(ㄱ씨) 따위의 심사가 어찌 그들만의 것일까. 그건 내 안의 꼭꼭 숨겨진,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나의 욕망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더 크게 그들을 조롱한 것은 나의 그런 감정이 드러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투박한 문장 속에서나마 문학적 향취마저 놓쳤다. 그건 사랑의 감정만이 빚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완벽한 심정적 일치를(가) 몇 번의 대화로써(만으로) 우리들은(사이에) 기적적인 해후처럼, 쌍무지개처럼 일어났던 것이오.”(ㅈ씨) “… 언젠가 너의 붉은 색 감도는 눈망울과 그 가장자리를 적셔 내리는 눈물을 보고, 너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ㄱ씨) 홀리긴 했지만, 그들의 믿음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인생에서 사랑은 단 한 번 찾아오는 게 아니다.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르트르 이외에 두 사람과 더 사랑을 나눴다. 특히 1947년 사르트르와 함께 미국에 강연여행을 갔다가 만난 소설가 넬슨 앨그렌과는 20년 동안 304통의 연서를 보낸다. 한 편지에서 보부아르는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당신 없이 그처럼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는 게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사랑은 그렇게 찾아온다. 보부아르, 피카소, 파바로티 같은 사람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갑남을녀 장삼이사 사기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사랑에나 진실은 있는 법이다. 설사 사기와 협잡에 놀아난 것이라 해도 거기엔 나름의 진정성이 있고, 고백이 있고 염원이 있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연애 사건’을 두고 다시 세상이 난리다. 국방사업을 농락한 11년 전 사건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호들갑은 몇 곱절 심하다. 수사기관은 편지까지 샅샅이 뒤지고, 언론은 거기에 의혹을 덧붙여 괴물로 만들었다. 정치적 목적과 장사치의 계산이 작용한 탓이다. 상심이 가장 컸을 그의 부인을 위로한 대통령 부인에게까지 의혹을 덧씌우는 행위에선 정략과 계산의 극치를 본다. 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렇다고 개인의 인격과 삶까지 파괴해선 안 된다. 사적인 진실을 능멸해서도 안 된다. 공적 차원에서 변씨의 문제는 연사가 아니라, 직권남용이다.

위선과 거짓이 판을 치는 시대, ‘죽어도 좋다’는 눈먼 사랑이 보고싶다. 호스티스의 도움을 받아야 술을 마시고, 마사지 걸을 고르는데 지혜를 발휘하는 자들이, 근엄한 척 폼 잡는 꼴만 보고 살 수는 없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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