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편집인
권태선칼럼
“역시 우리 국민은 합리적이야, 정치인들보다 더 낫네!”
휴가에서 돌아와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간의 남북 정상회담 합의 소식을 전하는 묵은 신문들을 뒤적이다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탄성이었다. 언론이나 정치권은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정상회담의 정치공학적 해석에 급급했지만 일반 국민은 그 정치공학을 꿰뚫어 보면서도 한반도 평화가 더 중요하다는 분명한 인식을 보였기 때문이다. 대다수 신문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이 야당의 대선 후보 선출 직후에 정상회담을 여는 것은 선거를 겨냥한 정치적 꼼수라며 일찌감치 선거에 끼칠 파장을 경계하는 목소리들을 다각도로 배치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발표 직후 실시된 한 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3.3%와 55.5%는 그 시기와 장소가 부적절하다는 데 동의하고 51.3%가 대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응답하면서도 절대다수인 80.5%는 회담 합의를 잘 된 일로 평가했다.
정상회담 합의를 비롯해 최근 한반도 주변정세의 완화를 가져온 요인을 여럿 들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가운데 하나가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 대한 국민의 이런 흔들림 없는 지지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해 10월 북한의 핵실험으로 남북 관계가 극도로 경색됐을 때도 그랬다. 대북제재론이 들끓고 정치권 일각에선 전쟁불사론까지 들먹였지만 국민들은 남북 화해를 바탕으로 교류협력을 확대해 ‘사실상의 통일’ 기반 마련을 목표로 삼는 대북 포용정책에 지지를 보냈다. 핵실험이 있은지 열흘이 채 안돼 실시된 한국리서치 조사에서 포용정책 전면 폐기 주장은 16.8%에 그쳤고 유지 의견이 77.5%였다. 그만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희구한다는 의미다.
정상회담에 임하는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물론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한나라당도 이런 국민들의 염원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막스 베버는 “정치가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와 미래에 대한 책임”이라고 말했다. 분단으로 생긴 갈등과 불화를 미래세대에까지 넘기지 않는 것이 우리 시대 남북 정치인들이 져야 할 미래에 대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두 정상은 이번 회담을 한반도,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의 초석을 다지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동북아에서는 힘의 균형이나 위협에 의해 지탱되는 국제관계만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 평화를 보장하는 지역 기구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이 싹트고 있다. 지역안보협력체로 전환될 수 있는 6자 회담의 진전 속에서 남북이 신뢰를 키워나간다면 지상의 마지막 냉전 보루가 해체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남북 경제협력 확대 또한 중요하다. 일부에서는 이번 회담에서 남쪽이 경협 확대를 약속하리라 전망하면서 이를 회담 대가의 후불로 폄하한다. 그러나 남북 경제의 연계는 서동만 교수의 지적처럼 “통일을 시야에 둔 한반도 경제공동체의 형성과정이자 한반도와 대륙을 시야에 둔 균형있는 국토공간 활용의 길을 여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철의 실크로드 발상에서 보듯이 동북아 지역협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상회담이 소기의 성과를 내게 하기 위해선 국민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하다. 일본 교토대의 야마무로 신이치 교수는 “어떤 국민도 자신의 정치윤리를 반영하는 것 이상의 정치가를 대표로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이를 뒤집으면 올바른 인식을 가진 국민들만이 정치가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견인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애초 정상회담에 반대 뜻을 밝혔던 한나라당이 여론조사에서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오자 조건부 찬성론으로 선회한 것이 바로 그 예다. 국민이 한반도 평화의 버팀목이 돼야 한다.
권태선 편집인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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