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신인가 인간인가? 존재의 부조리나 한계상황 앞에서 던지는 실존적 물음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욥의 경험을 기억하며 이렇게 묻는다. 왜 무고한 저에게 고통을 주시는가. 고통 속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당신의 뜻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신의 존재와 뜻이란 인간에 대한 지배와 억압을 합리화하기 위한 지배자의 상징조작 아닌가. 세상에 구원이 어디 있는가.
지난달 30일 타계한 스웨덴의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이 천착했던 주제였다. 그의 작품 가운데 <제7의 봉인>은 신의 존재와 구원의 문제를 다룬 대표작이다. 제목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의 상징에서 따왔다. 요한계시록은 신의 심판서를 밀봉한 7개의 봉인을 떼는 순간 펼쳐지는 종말의 모습을 전한다. 이 영화는 일곱째 봉인을 떼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어린 양이 일곱째 봉인을 떼자 반 시간 동안 하늘에는 침묵이 흘렀다(8장 1절). … 그리고 나는 나팔을 든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 준비를 하는 것을 보았다(6절)”는 구절이 흘러나오면서, 주인공 블로크 앞에 ‘죽음’이란 이름의 사자가 나타난다.
14세기 후반, 성지 탈환과 악에 대한 심판을 명분으로 전개된 십자군 원정이 피와 죽음만을 남기고 끝날 무렵이었다. 신의 부름이라고 생각해 나섰던 원정길이었지만, 10년간의 맹목적인 살육 속에서 신의 존재와 구원에 대한 블로크의 의문은 깊어졌다. 그는 신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다. ‘죽음’은 선선히 집행을 유예했다. 어차피 죽을 텐데…. 돌아온 고향은 흑사병이 휩쓸고 있었다. 온통 죽음뿐이었다. 교회는 악마 탓으로 돌리며 마녀사냥에 나섰다. 그러나 마녀로 몰려 화형을 기다리는 무죄한 소녀 곁에도, 신의 징벌을 앞세워 협박을 일삼는 근본주의 성직자 집단 곁에도 신은 없었다. 신의 침묵에 고통스러워하던 블로크는 결국 확인을 포기한다. 그리고 ‘죽음’이 이끄는 대로 미련없이 세상을 떠난다. 신의 침묵(혹은 배반)과 구원의 문제는 배우 전도연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이창동 감독의 <밀양>의 주제이기도 했다.
탈레반의 인질 납치 사태가 일어난 지 3주가 되었다. 피해자 가족은 애끓는 절규로 신의 은총을 갈구했다. 정부와 시민사회도 아프가니스탄과 탈레반 그리고 미국에 협조를 간절히 호소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구원의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숨막힐 듯한 침묵만 계속된다. 그렇다고 신을 탓하거나 원망할 일은 아니다. 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침묵해 왔다. 교회의 마녀사냥에 무고한 딸들이 불태워질 때 십자군의 무참한 살육전 앞에서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인종청소가 자행될 때도 그랬다.
중세 때 교황청이 문제였던 것처럼 지금도 문제는 신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아프간을 침공했고, 괴뢰정권을 세웠고, 탈레반의 저항을 초래했고, 탈레반 포로를 구금하고 있는 미국이다. 한국의 개신교도들이 신의 나라로 여기는 곳이다. 중세의 교황처럼 현대사에서 신권을 행사한다. 신의 이름으로 불량국가들을 선별하고,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침공을 단행했다. 그것이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의 일환인 줄 알면서 우리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군말 없이 따랐다. 미군이 가는 곳에 한국군은 갔다. 그러나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어제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탈레반에게) 어떠한 보상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앞서 이들은 골프 카터에 올라, 보도진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이 죽음 앞에 서 있는 한국인 인질에게 의미하는 건 자명하다. <밀양>의 신애는 신의 은총을 주절거리며 웃음짓는 유괴범 앞에서 신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곽병찬 논설위원ck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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