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2003년 6월22일 그곳에서 교황 바오로 2세가 한 강론은 이렇게 시작했다. “엄청난 핍박과 살육으로 얼룩진 이 도시에서 가톨릭 교도들이 범한 인륜과 자유, 인간 존엄성에 반하는 죄를 사하고 서로 용서하는 마음을 더욱 강하게 해 줄 것을 기도 드립니다.” 이어 대립하고 갈등하는 로마 가톨릭의 크로아티아계와 정교의 세르비아계, 그리고 이슬람교도의 화해를 기원했다. 그런 그를 나토 평화유지군은 무려 4000여명의 군·경을 동원해 보호해야 했다.
바냐루카, 보스니아-헤르체비고나연방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수도. 로마의 성채와 400~500여년 전 지어진 이슬람과 정교회의 사원과 수도원이 고색을 뽐내고, 울창한 가로수 숲길로 유명했던 곳. 바오로 2세가 특별히 101번째 국외 방문지로 선택했던 곳.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교황은 용서부터 빌어야 했던 것일까?
2차 세계대전 주축국 독일과 이탈리아는 발칸 지역을 점령한 뒤 바냐루카를 가톨릭계의 크로아티아에 귀속시켰다. 당시 그곳 주민은 세르비아계 정교도가 과반을 차지하고 가톨릭계는 20~30%였다. 정교도는 저항했다. 1942년 2월7일, 가톨릭 신도들로 구성된 민병대 우스타샤는 한 가톨릭 사제의 지휘 아래 어린이 500여명이 포함된 2500여 세르비아계 정교도를 살해했다. 이후 다른 종교인들은 죽음의 수용소(야세노바츠, 스타라 그라디슈카)로 보내졌다. 이 사건은 파시스트에 의한 인종청소와 학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50년 뒤 보스니아 내전이 터졌다. 정교도의 보복이 시작됐다. 얼마나 극심했던지 바냐루카의 9만여 비정교도들은 내전 중 1000여명으로 줄었다. 고풍스런 이슬람 사원과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은 파괴됐다. 종전 후 10여년이 흘러 인구도 30여만명으로 늘었지만, 비정교도는 5% 미만이다. 바냐루카는 지금도 학살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다.
대체로 기독교의 만행은, 다른 종교나 다른 교파의 신앙과 교리를 부정하고 배척하는 ‘획일적 신학’에서 비롯됐다. 이는 정치적 극단주의와 결탁해 전쟁을 도발하고, 학살을 저지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파시즘과 함께 저지른 유대인 학살이나,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결합해 저지른 보스니아 학살과 인종청소는 일부 사례일 뿐이다.
이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였다. 공의회는 요한 23세의 제안에 따라 ‘아조르나멘토’(쇄신) 기치 아래 진행돼, 네 헌장, 아홉 교령, 세 선언을 채택했다. 방대한 문헌의 바탕은 ‘가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정신이었다. 그것은 “…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신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혹은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며 … 다른 종교인들의 정신적 도덕적 자산과 사회·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라” 등으로 구체화됐다. 공의회가 이렇게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형제로 대하기를 거부”해선 안 된다. 혁명적 전환이었다.
최근 보스니아의 스레브레니차에선, 내전 중 정교도가 학살한 8000여 주검 가운데 새로 발굴된 400여구의 추도식이 열렸다. 그날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 이외의 다른 교파는 참 교회가 아니다’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세계는 귀를 의심했다. 평화를 향한 위대한 전진이었던 2차 공의회는 전복되는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조롱하는 이들을 위해 한 기도가 교황에게 겹쳐진다. ‘저희는 자기가 하는 일을 모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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