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칼럼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은 포숙아를 그리며 “날 낳으신 것은 어머니지만, 나를 알아준(知己) 것은 포숙아”라고 했다. 거문고의 신 백아는 종자기의 죽음 앞에서 “내 소리를 알아줄 사람(知音)이 없으니 이제 무슨 소용인가”며 줄을 모두 끊어버렸다. 두 고사는 관포지교(管鮑之交)와 백아절현(伯牙絶絃)으로 남아 있지만, 지극한 신뢰와 헌신으로 쌓아올린 이오덕과 권정생의 우정을 오롯이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오덕은 그를 잊을 수 없어 당신의 무덤가에 그의 시비를 세우도록 했고, 권정생은 그가 떠나자 한동안 사람도 원고지도 마주하지 않았다. 이오덕은 그의 작품과 삶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고, 권정생은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제가 여태껏 살아올 수 있었을까요”라고 고백하곤 했다. 둘은 서로에게 살아가는 이유였다.
이오덕이 안동 일직면 조탑리로 권정생을 찾아간 것은 1972년 가을. 환상과 허구로 도배질한 동화들 틈에서,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삶의 진실을 건져낸 동화 <강아지똥>을 읽은 뒤였다. 시골교회 종지기였던 지은이는 결핵이 골수에 스며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했다. 이오덕은 그에게서 ‘우리 동화의 희망’을 발견했고, 권정생은 그에게서 진실로 믿고 의지할 사람을 찾았다. “바람처럼 오셨다가 많은 가르침 주시고 가셨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선생님 앞에서 마음 놓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 선생님을 알게 돼 이젠 외롭지 않습니다.”(권정생) “산허리 살구꽃 봉오리가 발갛게 부풀어 올라,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걸 보고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괴로울 때마다 선생님을 생각해봅니다.”(이오덕)
이후 이오덕은 그의 작품을 알리고 그를 지키고자 서울로 대구로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다. 당시만 해도 원고료를 주는 출판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 제가 무능해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저 용서를 바랍니다.” “우편환으로 7천환을 부쳐드립니다. 급한 대로 양식과 연탄 같은 것을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 더 보내주시면, 상경하는 길에 어느 잡지에나 실리도록 하겠다”고 욕심을 내곤 했다.
이오덕 덕분에 권정생은 창작에 몰두했다. 전신결핵으로 하루를 버티는 것도 기적만 같았던 그였다. “누워 있지도, 앉아 있지도 서 있지도 못하는 상태가 16일간 계속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른다던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몽실언니> 등을 썼다. “이틀간 가까스로 원고지 20장을 썼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비참해서 쓰기가 고통스럽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이오덕은 “사람 같지 않게 살아가는 나 자신이 한없이 미워진다”며 자책하곤 했다.
3년 전 이오덕은 떠났다. 권정생을 두고 떠나는 게 못내 걱정됐던지 이런 유언을 했다. “괴로운 일, 슬픈 일들이 많아도 하늘 보고 살아갑시다. 부디 살기 위한 싸움을 계속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담에 때가 되면 선생님이 걸어가신 그 산길 모퉁이로 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만나 뵙겠다”고 답했던 권정생. 그도 엊그제 이승의 모퉁이를 돌아섰다.
권 선생의 유골이 뿌려진 조탑리 빌뱅이 언덕, 이 선생의 무덤이 있는 충주 무너리 마을 어디에도, 이제 두 분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살구꽃은 지고 없다. 대신 그 산모퉁이 숲 그늘에, 찔레꽃이 한창일 것이다. 가난한 아이를 닮은 꽃, 포근한 향기로 그 아픔을 위로하던 꽃. 사랑과 헌신, 눈물과 감동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두 분은 찔레꽃 향기로 남았다. 우리는 언제 다시 그런 인연을 볼 수 있을까.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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