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김지석칼럼
세계 인구는 한 해 한반도 인구만큼 늘어난다. 에너지 소비는 그 갑절 넘는 비율로 많아진다. 반면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 공급은 곧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건조지대는 갈수록 넓어지고 곳곳에서 지하수가 바닥을 드러낸다. 지금 지구 온도가 올라가는 속도는 과거 엄청난 생태계 변화를 수반한 간빙기 때보다 100배 이상 빠르다. 물과 농지 부족, 에너지난, 환경 난민 등에 따른 정치·사회적 갈등이 문명의 기초를 뒤흔든다. 한두 세대 안에 지구촌에 닥칠 시나리오다.
근현대 사회를 이끌어온 삶의 방식은 한계에 이르렀다. ‘플랜 에이(A)’(기존 방식)가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플랜 비(B)’, 곧 대안 또는 비상계획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눈앞에 파멸이 닥칠 때까지 기존 방식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중동 정책도 그렇다. 군사우선 주의와 일방주의, 민주주의 확산론을 핵심으로 하는 조지 부시 행정부의 중동 정책은 이미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 전역에서 파탄 상태에 있다. 그런데도 부시 행정부는 막연하고 희박한 성공 가능성을 거론하며 기존 정책을 고수한다. 여러 대안이 서랍에서 잠자는 동안 사태는 더 나빠진다.
다행히 북한 핵문제는 ‘플랜 비’로 넘어가고 있다. 2001년 초 출범한 부시 행정부는 이전 빌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을 부정하는 것 말곤 별다른 대북 정책을 내놓지 못하다가 1년 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바 있다. ‘클린턴 부정’(ABC: Anything But Clinton)과 대북 적대가 플랜 에이가 된 것이다. 미국은 지난해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보고서야 기존 방식의 한계를 인정했다. 6자 회담 2·13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면 플랜 비는 튼튼하게 뿌리내릴 것이다. 북한이 플랜 비로 옮겨갔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제까지 북한의 플랜 에이는 선군정치와 핵 개발, 벼랑끝 전술이었다. 이런 방식으로는 국제적 고립과 체제 생존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이상 핵 포기와 개혁·개방은 북한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그리고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있다. 정부는 개방 확대라는 충격요법으로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만성적 국내 수요 부족 문제를 우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수십년 경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되풀이돼 온 발상이다. 준비 안 된 개방으로 말미암은 국민들의 고통과 경제·사회 구조 왜곡에는 눈을 감는다. 계층·지역·산업·기업규모 등에 따른 양극화 추세와 경제 전체의 대외의존 체질은 더 심해질 것이다. 1990년대의 무분별한 세계화가 아이엠에프 위기를 불렀듯이 졸속으로 추진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더 큰 위기를 낳을 수 있다. 정부가 지난해 초 전격적으로 협상 시작을 선언한 이후 국론은 분열되고 정치·사회적 갈등은 심화돼 왔다. 협상의 득실을 따지기에 앞서 내부 상처 치유 비용을 더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우리에게 맞는 사회·경제 발전 전략을 모색하기보다 기존 방식을 답습한 결과다.
전환기인 지금 많은 나라가 좌절을 맛본다. 실패한 나라인 북한뿐만 아니라 유일 패권국인 미국도 선진국 진입을 내다보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생태 위기처럼 기존 방식의 모순 누적이 핵심 요인일 수도 있고, 지금까지 통했던 여러 전제들이 바뀐 상황과 충돌하기도 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미국의 중동 정책에서 보듯이 정치 지도자의 구태의연한 행태와 자존심도 사태를 그르친다. 시대는 기존 방식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대안을 적극적으로 찾아나갈 것을 요구한다.
김지석 논설위원jkim@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