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김지석칼럼
몇 해 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전후해 ‘부시스럽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사람. 말이 안 되는 논리를 말이 되는 양 주장함. 남의 바른 소리는 듣지 않고 자기 고집만 내세움’ 등의 뜻이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억지 침공 논리를 꼬집는 한국 누리꾼들의 기민한 신조어였다.
부시 대통령이 며칠 전 새 이라크 정책을 내놓으면서 한 연설 역시 ‘부시스럽다.’ 그는 이제까지 이라크 정책이 실패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핵심 과제의 하나인 수도 바그다드의 치안 확보에 실패한 이유를 병력 부족과 미군에 대한 과도한 규제로 돌렸다. 그러면서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 작전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적’ 군사 대안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그는 이라크전을 “한쪽에는 자유와 중용을 믿는 사람이, 다른 쪽에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극단파”가 있는 “우리 시대의 결정적 이념전”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결국 미국인을 보호하는 가장 현실적인 길은 자유를 진전시킴으로써 적들의 증오스러운 이념에 대한 희망적 대안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라크 정책을 주도해 온 네오콘 특유의 흑백논리와 민주주의 확산론의 반복이다.
리처드 하스는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을 지내고 미국외교협회 회장으로 있는 외교 전문가다. 그는 최근 <포린 어페어스>에 실은 ‘새로운 중동’이라는 글에서, 근·현대 중동의 네번째 시기인 ‘미국 시대’가 끝나고 다섯번째 시대가 시작됐다고 썼다. 주도권을 행사하는 세력을 기준으로 볼 때, 쇠퇴하는 오토만 제국 시대(18세기 후반~1914년)와 프랑스·영국 시대(~1956), 아랍 민족주의 시대(~1991)를 거쳐 91년 걸프전과 함께 미국 시대가 시작됐으나 그릇된 이라크 침공과 중동 평화협상 실패 등의 이유로 10여년 만에 끝났다는 것이다. 다섯번째 시대에는 외세보다 현지 세력들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 줄 알고 이라크 점령을 비롯한 중동 정책을 빨리 바꿔야 한다는 게 그가 부시 행정부에 던지는 강력한 충고다. 물론 부시의 새 이라크 정책은 이 충고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스 식의 시대 구분을 근·현대 동북아에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될까. 쇠퇴하는 중국 시대(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 일본 시대(~1945)를 지나서 이제 미국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시대는 중국이 부상하고 1990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빌 클린턴 전 행정부는 이를 인정하고 미-중 공존·협력과 북-미 화해를 중심으로 관계 재편을 모색했으나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어 등장한 부시 행정부는 중동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 시대의 장기 지속을 전제로 정책을 바꿨다. 그럼으로써 이라크 경우처럼 겪지 않아도 될 갈등과 고통을 만들어냈다. 이라크 정책의 실패가 중동에서 미국 시대의 종말을 알린다면, 동북아에서는 북한 핵문제의 진전 또는 파국이 그 분기점이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동북아 나라들 스스로 본격적 주도권을 행사하는 시대가 온다. 한국은 핵문제 해결에서 주도적 구실을 함으로써 그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6자 회담뿐만 아니라 정상회담 등 남북 직접 접촉도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
한 시인은 ‘역사는 아름다우나 괴팍한 아가씨’라고 했다. 물 흐르듯이 순조롭지만은 않은 게 역사다. 힘과 힘이 엇갈리면서 마찰이 생기고, 누구도 원하지 않는 주름을 곳곳에 만들어 낸다. 긴 시간으로 보면 작은 주름이지만 그 속에 끼인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굴곡이다. 우리는 그 주름을 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논설위원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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