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개헌에 대한 시중의 여론은 이렇게 요약된다. “현행 헌법엔 문제가 있다. 개헌은 해야 한다. 한다면 대통령 4년 연임제가 좋겠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다음 정권에서 해야 한다.”
이런 여론은 정치권의 흐름을 반영한다. 한나라당은 이미 개헌 논의에 일체 불응하기로 했다. 다른 야당도 청와대의 개헌설명회에 불참했다. 이들 역시 개헌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지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 뿐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개헌 공약을 걸고 다음 대통령 집권기간 중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야당 태도는 반대론이라기보다는 회피론에 가깝다.
회피론이라는 말엔 힐난이 섞여 있다. 그럴만도 하다. 다음으로 미룬다면 사회적 비용이 더 들고, 성사될 가능성도 낮다는 사실을 이들이 모를 리 없다. 사실 새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개헌 논란에 휩싸이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내각제 개헌 등 권력구조 문제나 영토 조항, 경제 조항까지 쏟아져 나올 게 자명하고, 대통령은 집권기간 내내 개헌 논란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집권세력은 민생과 경제살리기를 들추며 피하려 하겠지만, 공약으로 내건 것을 야당이 물고늘어지는데 피할 길도 없다. 게다가 막대한 비용을 치르면서도 합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합의는 지금처럼 야당의 집권 가능성이 압도적인 상황에서나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몸과 의식이 따로 놀고 있다. 욕구와 당위가 충돌한다. 중추신경은 판단하고 지시하지만 몸은 이를 거부한다. 의식은 앞으로 가고자 하나, 몸은 뒤로 잡아당긴다. 뇌성마비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멋대로 돌아가게 한 것은 증오와 불안이다. 대통령의 제안은, 야당과 그 지지자들의 적개심을 일거에 폭발시켰다. 지난 총선에서 참패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불안을 증폭시켰다.
가장 큰 책임은 노 대통령에게 있다. 그는 선의조차도 ‘꼼수’로 비치게 할 정도로 불신을 키웠다.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는 일마저도, 그가 하자고 하면 못 하겠다고 더 많은 사람이 버틸 정도로 미움을 키웠다. 그가 자초한 불신과 미움은 그가 국가적 과제로 제시한, 바로 그 개헌 추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억울할지 모른다. 그러나 설득해야 할 상황에서 벌인 ‘나쁜 대통령’ 입씨름을 돌아보면 그 이유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논쟁에선 이길 것이다. 그러나 미움과 불신을 키우고, 그에 따라 과제 해결은 어려워진다.
야당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정치 지도자라면 모름지기 국가와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대통령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설사 ‘나쁜 대통령’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라도, 국리민복에 필요하다면 앞장서서 국민과 지지자를 설득해야 한다. “꼼수라 하더라도 속지 않을 국민의 지지가 든든한 이 시점에서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써 수권정당으로서의 통을 보여야 한다”는 이계진 의원이 커보이는 연유가 여기 있다. 노 대통령을 실패하게 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국민까지 실패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게 도리다.
이대로라면 개헌은 어렵다. 그 결과 국민은 지난 20년 동안 겪었던 경험을 되풀이해야 한다. 임기 중 여당의 문패가 한두번씩 바뀌고(정치는 혼란에 빠진다), 임기 중반만 지나면 대통령은 극복의 대상이 되고(국정의 중심이 흔들린다), 후반기엔 탈당 혹은 신당 창당 따위의 정치게임으로 국정은 표류한다 …. 그로 말미암은 고통은 국민에게 돌아간다. 정치인이라고 마음 편할 리 없다. 그들에겐 역사적 책임이 돌아간다. 역사의 법정은 그들에게 직무유기로 유죄 평결을 내릴 것이다.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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