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
조순칼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제안을 미국이 먼저 했는지 한국이 먼저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이 충분한 사전검토 없이 덥석 이 사안을 끌어안은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미국으로서는 합의가 잘되면 좋고 잘 안 돼도 본전이겠지만, 한국으로서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좋은 일이 적을 것이다. 합의에 실패하면 정권이 타격을 받을 것이고, ‘성공’하면 많은 국민이 손해를 보고 사회 분열과 혼란이 가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농산물 수입관세를 철폐한다면, 이 나라 농민과 농업과 농촌은 어떻게 되는가. 농민은 생존기반을 잃고 농업은 줄어들고 농촌은 황폐해질 것 아닌가. 상당한 유예기간이 주어진다고 하지만, 운명의 순간은 언젠가는 올 것이다. 한국은 이미 농업국가가 아니라고 하지만, 농업은 여전히 이 나라의 기간산업이고, 농민은 여전히 많으며, 농촌은 여전히 국민정서의 고향 아닌가. 유럽나라들은 한국보다 더 앞선 공업국들이 됐는데도, 왜 농업을 끝까지 보호하려 하는가. 일본은 우리 못지않은 산업국인데도, 왜 미-일 자유무역협정은 염두에 두지 않는가. 산업화가 되면 될수록 농업과 농촌의 중요성도 더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무역협정은 윈-윈 게임이라 하지만 그런 공허한 소리로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장밋빛 전망에는 설득력이 적다. 거기에는 결론부터 미리 내놓고 숫자를 꿰맞춘 흔적이 보일 뿐, 국가의 대사를 논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역사의식이 없다. 혼란시대의 미래와 변화하는 세계의 대국을 내다보는 안목이 없다. 자유무역협정은 수출과 외국인의 직접투자 증가를 통해, 이 나라의 경제성장이 촉진되리라 한다. 우리 경제의 대미 거래 현실과 구제금융 이후의 우리 경험은, 이 전망의 현실성을 의심하게 한다. 협정으로 말미암은 성장촉진은 양극화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 반대가 옳을 것이다. 협정은 또 한국경제에 금융허브를 가지고 온다고도 한다. 이 기대에도 현실성이 적다. 실물경제의 성장잠재력이 침체하는 곳이 금융허브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엔론사건 이후 제정된 사베인스-옥슬리법 때문에 미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하는 외국기업이 줄고 있다. 이 나라가 미국식 법률만능 주의를 모방하면 할수록, 금융중심을 만들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협정은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증진하리라 한다. 반미감정이 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나는 그 반대가 될 것을 두려워한다.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미국을 미워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지금 자유무역협정 신드롬에 걸려 있다. 이 협정이 만능인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문제는 성장을 보장하는 기본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자유무역협정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기본의 취약을 입증하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물가가 세계 최고 수준이고, 대기업의 임금은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다. 노조가 너무 전투적이고 파업이 잦아서 기업환경이 열악하다. 국내의 기업 투자가 적은데다 투자가 일부 산업에 집중되어 고용효과는 낮다. 교육은 쓸모없는 학사들을 양산하고 있다. 서민이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어서 구매력이 없다. 반면 씀씀이가 헤픈 사람이 많아서 대외거래의 서비스 수지가 너무 큰 적자를 보이고 있다. 정치는 캄캄한 터널을 달리고 있고, 사회는 끝없는 분열로 치닫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은 이 모든 병폐를 조장하면 했지 치유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앞으로 1년 반, 정부는 이 협정에 전력투구할 것이 아니라, 경제의 기본을 세우는 데 전력투구하기 바란다.
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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