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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초라함을 막는 보호막: 마음, 몸, 관계

등록 2024-01-11 15:29

[안희경의 이방인, 초라함의 상대성]
13_모두의 카페 랏티코른 언니네
지난해 가을, 전남 곡성의 섬진강변 강빛마을에서 개최한 가을음악회에 필리핀계 이주여성들이 여럿 참여해 필리핀 전통춤을 선보였다. 필리핀계 이주여성들과 함께 셀카를 찍는 파와싯 랏티코른(맨 앞)의 모습. 파와싯 랏티코른 제공

전남 곡성에 봄이 산다. 이름은 파와싯 랏티코른, 52살 타이계 여성이다. 타이에서는 이름이 길어 다들 애칭으로 부르는데 그의 애칭이 봄이다. 나는 봄을 세번 만났다. 두번은 지난해 3월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고 세번째는 12월 그의 집에서다. 봄은 타이에서 변호사였다. 변호사가 왜 한국 농촌으로 시집왔는지 듣고 싶어 만남을 청했다. 이주여성들은 가난해서 한국에 시집온다는 통념에 균열을 내줄 것 같았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곡성 이주여성들 큰언니의 활동에 매료되었다. 모두의 카페로 열려 있는 그의 공간이 궁금해졌다. 한계를 맞아가는 지구인의 삶에 ‘그래도 재밌게’라며 작당할 비법을 품고 있는 것 같아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지리산 서쪽 끝자락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봄은 중고등학교에서 한학년씩 월반해 16살에 봉차발릿쿨대학교 법대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다. 운동에도 진심이라 대학생 유도대회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받았지만 법조인의 꿈은 놓지 않았다. 21살에 변호사가 되었다.

꿈의 실상은 스트레스 둥지였다. 타인을 돕는다는 본질은 좋았지만 그 속에 악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딜레마였다. 봄이 로펌에서 두각을 나타낼 즈음, 무료변론 사건을 배당받았다. 마약사건에 연루된 고등학교 1학년생 변호를 맡았는데, 지독하게 가난한 소년의 아버지가 밤새 기차를 타고 와 봄의 집 앞에서 네시간을 기다려 출근하는 그에게 매달렸다. 봄은 그 어떤 사건보다 열심히 준비했다. 다들 15년 징역형을 예상했지만 소년은 1년6개월형을 받았다.

기쁨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온갖 마약사범들이 봄을 찾아왔다. 돈과 권력이 로펌을 압박했고 범죄조직들도 들이닥쳤다. 봄은 푸껫으로 피신해 2년 휴식기를 가진 뒤 돌아왔지만 상황은 고스란히 재연됐다. 틈틈이 나갔던 법대 강사 일이 더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씻어내지 못하고 미뤄둔 마음의 더께가 초라함이 질퍽이도록 일상을 물들였다. 흔들리는 마음은 기댈 곳을 찾기 마련일까?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졌다.

봄은 타이 남성들이 자신에게 다가온 이유는 그럴싸한 직업을 가진 여성을 옆에 세워두고 싶어서라고 판단했다. 첫 남자친구가 은연중에 내비친 한마디는 타이에서의 결혼을 포기하게 하였다. 자기 형이 저택 일곱채를 지어 일곱명 아내와 행복하게 산다는 자랑이었다. 타이는 공식적으로 일부일처제지만, 부와 권력을 누릴수록 계속 아내를 맞는 게 용인되는 축첩사회다. 영어와 라오스어를 하는 봄은 외국에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도시에서 아토피로 피부과를 들락거렸기에 농촌살이를 동경했다. 소개받은 한국 남성의 인상이 좋았다. 부모님도 사윗감을 마음에 들어 했다. 35살, 봄은 그렇게 곡성에 당도했다. 봄의 생일이 다가올 때면 섬진강은 벚꽃비를 내린다. 봄의 봄은 화사했다.

봄은 금세 곡성 사람이 되었다. 시어머니의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어졌고, 타이에서 온 엄마와는 자매처럼 살가워졌다. 이주여성들과 가까워질수록 봄의 마음에는 안타까움이 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시집온 친구들은 사회 경험이 부족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서툴고 나이 차이 많은 남편은 무뚝뚝해 편들어 주는 사람이 없어 우울해 했다. 특히 마흔 넘긴 아들이 안쓰러워 결혼 주선 회사에 3천만원 내고 며느리를 들인 집안에선 선금 주고 데려온 일꾼인 양 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집온 지 10년 넘도록 친정에 가지 못한 베트남계 아이 엄마가 마음에 걸렸다. 하우스 농사를 열동이나 짓는데 시부모와 아들 며느리만 일하기에 쉬는 날이 없었다. 봄이 그 시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른은 살기 빠듯하다며 하소연했고 봄은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멜론 하우스농사 세동 짓는데도 해마다 타이 친정에 다녀온다고. 그리고 친정에 안 보내도 월급을 줘서 스스로 준비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손주들 엄마니 물건 취급하면 안된다고도 못박았다. 그달부터 베트남계 아이 엄마는 월급을 받았고 방학이면 아이들이 외갓집에서 사랑받고 오는 추억을 갖게 됐다.

우즈베키스탄계 엄마는 시어머니와 다툼이 잦았다. 팔순 시어머니가 어린 손자들 곁에서 담배를 피웠고, 며느리 항의에 “내 집”이라며 언성을 높였다. 한국 문화에 훤한 봄은 며느리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노인을 고치려 들지 말라고. 며칠 뒤 새댁이 울면서 전화했다. 집을 나왔는데 남편에겐 방 얻을 돈이 없다고. 봄은 한국인 언니에게 전화를 넣었다. 전셋집을 얻자마자 인천 사는 아들네로 가게 된 언니였다. 새댁의 사정을 호소해, 방세 걱정 없이 전세기한까지 살도록 연결해 줬다. 봄은 곡성에 사는 2백여가구의 식구들 이름, 나이, 아이 학년뿐 아니라 그 집 수저 개수까지 안다.

봄을 처음 만났을 때는 곡성 가족센터에서 이중언어 코치와 상담 일을 10년째 하고 있었다. 출신 나라별 자조모임 뿐 아니라 한국인 아버지들의 자조모임 등 다문화 가정을 보살피느라 바쁘면서도 법정과 병원에서의 통역뿐 아니라 이주노동자들 개인 통역도 무료로 도왔다.

봄은 이주민 동생들에게 두가지를 당부한다. 하나는 언어다. 아이에게 엄마의 언어를 가르치고, 엄마는 한국어를 배우자고. 엄마와 대화가 막히면 아이는 엄마의 슬픔과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자기가 잘하는 말로 아이와 많이 이야기하면 된다. 특히 다섯살까지는 돈 벌겠다는 생각 접고 아이와의 관계에만 몰두하자고 부탁한다. 그리고 엄마는 반드시 3년간 한국어 공부에 매진하라며 그래야 월급을 더 받는다고 북돋는데, 봄의 진심은 아이들이 중학생만 돼도 한국어에 어눌한 엄마를 창피해하는 모습을 많이 봐서다. 봄은 친구들의 미래를 지켜주고 싶어 한다.

봄의 두번째 당부는 우리동네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웃과 어울리는 삶, 내가 사는 동네의 발전을 모색하는 삶이다. 봄은 마을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군청에 가서 지원을 요구했다. 봄은 말한다. “나서서 제기하고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지역엔 돌파구가 생겨요.”

봄이 곡성에 왔던 17년 전만 해도 가난한 동네였다. 예산도 적었다. 지금은 복지가 잘 된 동네로 꼽힌다. 군민들이 서로 노력한 결과이고, 구성원의 요구에 따른 행정의 움직임이 눈으로 확인되는 규모이기에 효율 있게 진전됐다.

10년 전,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을 만나 대담할 때 그는 자본에 종속된 신자유주의 시대지만 시 단위 규모에 집중해 변화를 강구하자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대도시의 동이나 지방의 읍·면 단위일 것이다. 이주민 선주민이 함께 움직여 온 곡성이 그 증거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봤다.

봄은 살림이 넉넉하지 않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쌀이 떨어지면 동네 한국 언니네 쌀독에서 퍼올 수 있고, 돈이 떨어져도 새 밥 지어 반찬 들고 올 친구들이 동네 곳곳에 있다. 봄이 도와 온 이웃들이다. 관계 속에서 봄의 안전망은 두터워졌다.

봄은 아침 6시 반이면 가부좌를 틀고 명상한다. 생각이 명료해지기에 호흡에 집중한다. 그의 마음 단속이다. 지난 8월에는 꽤 힘들었다. 타이에 계신 어머니가 몸져누워서다. 사춘기 딸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코로나로 장례에 가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까지 사무쳤다. 평소보다 더 오래 달렸고 더 무거운 쇳덩이들을 들었다. 그렇게 마음의 무게를 덜어냈다. 운동, 이 또한 그의 마음 단속이다.

봄은 귀화하지 않고 영주권자로 살아간다. 이 땅에서 외국인 주민으로 당당히 사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고 밝혔다. 무엇이 그를 초라함에 물들지 않게 지켜주는 걸까?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2002년 미국으로 이주,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인류 생존을 위한 10년 전략을 제시하는 대담집 ‘내일의 세계’, 세계 지성들과 코로나19의 원인과 미래를 탐색하는 ‘오늘부터의 세계’, 리베카 솔닛 등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대담 ‘어크로스 페미니즘’, 문명의 현재와 이를 만들어온 개인의 마음 운용 실체까지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세계 지성 29인과의 대담 3부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문명, 그 길을 묻다’, ‘사피엔스의 마음’, 현대미술 작가들과의 대담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이해인의 말’, ‘최재천의 공부’, 에세이 ‘나의 질문’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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