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석 | 문화비평가
누군가를 기죽일 때 쓰기 좋은 말이 있다. “너 좀 구린 거 알아?” 미팅 때 옷차림, 동호회 파티에서 튼 음악,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 등 마음을 후벼 팔 기회는 많다. “너 멍청해!”라면 어떻게든 영민함을 발휘해 회복할 텐데, 아름다움이란 점수로 측정 안 되고 주관에 좌우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핀잔을 들어도 극복할 방법을 찾기 어렵다.
새해를 맞아 그림, 공예, 연주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푸념한다. “재료나 악기는 선생님 추천으로 샀어요. 그런데 감각은 어디에서 팔아요?” 패션, 디자인, 예술 쪽 직업을 원하는 창작자들은 이런 한탄도 한다. “가끔은 화가 나요. 내가 정말 노력하면 기술은 따라갈 수 있어요. 그런데 미감은 아니에요. 있는 집 애들이 어릴 때부터 보고 듣고 키워온 감각은 따라갈 수 없어요. 질투 나서 미치겠어요.”
이런 사람들이 정말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다. “촌스러워!” 나는 지방의 소읍 출신이지만 서울에 와서도 문학, 미술에 대한 감각이 뒤처진다는 생각은 안했다. 하지만 옷차림은 영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향집인 읍내 옷가게에서 가져다 입는 옷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옷 좀 입지 마!” 서울 친구들은 못마땅했는지, 내 옷장에서 가장 비싼 옷을 가위로 자르는 의식까지 벌였다.
항우가 결전을 앞두고 솥을 깨고 배를 가라앉힌 파부침주의 마음으로 패션 개조에 나섰지만, 월세 내기도 버거운 20대의 경제력이 앞을 막았다. 결국 정공법보다는 특이함으로 극복해 보려 했다. 그러다 안경점에서 독특한 옥색 테를 찾았다. 주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먼지를 닦으며 테를 건넸다. “옛날에 아주머니들이 쓰던 건데.” 그러곤 뉴욕에 갔는데, 하루에도 몇번씩 안경이 멋지다는 칭찬에, 자기 것과 바꾸자며 떼쓰는 말까지 들었다. 브루클린 플리마켓에선 패션 블로거가 사진을 찍고 인터뷰하더니 ‘기이하지만 귀엽다’(Bizarre but Cute)라는 칭찬인 듯 아닌 듯한 평을 올리기도 했다.
미의식은 극히 주관적이니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내 직업의 절반이 비평가였던 터라, 미의 기준에는 오히려 엄격한 편이다. ‘고기 맛도 먹어 본 놈이 안다’고 어린 시절 체험이 심미안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도 여긴다. 다만 미를 찾아가는 경로는 다양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고등학교 때 육성회장 아버지를 둔 잘생기고 노래도 잘하던 반장이 있었다. 얘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친구로 점찍고선 자신의 놀이터였던 합창부에 넣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저런 ‘돈 쓰는 모임’엔 함께할 수 없었다. 당시 그룹 ‘들국화’가 전국투어를 하며 바람몰이를 했는데, 반장 무리는 그들만의 음악 체험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합창부실에 남은 아이들과 독일 가곡집을 쓸쓸히, 그러나 꼼꼼히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내 음악의 기초 소양은 그때 얻었다.
나는 그때의 부자 친구들보다 요즘의 평범한 아이들이 훨씬 부럽다. 1970~80년대 화가들은 전시회 도록에 ‘구라파 여행’ 같은 이력을 적곤 했다. 해외여행 자유화 세대인 나는 그들보다 미술 교과서의 작품들을 훨씬 더 많이 봤다. 요즘 젊은이들은 또 나의 몇 곱절 되는 경험을 쌓고 있을 거다. 국내에서도 뛰어난 전시와 공연, 창작을 위한 수업이 넘쳐난다. 인터넷만 뒤져도 입이 찢어진다.
물론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높은 계단을 만나기도 한다. 지금의 부유한 부모는 해줄 게 많다. 어릴 때부터 해외 전시와 공연에 데리고 다니고, 약간의 관심을 보이면 전문가 레슨을 붙이고, 실력이 쌓이면 부담 없이 유학도 보낸다. 이런 경험을 가지지 못한 친구들이 맞닥뜨리는 절망 역시 이해한다.
누군가 내 미감을 훔쳐갔다? 그러면 되찾아야지. 재력과 인맥이 없어 예술을 향유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자의 질투, 소외, 무력감으로 세상을 거닐어 보라. 툭툭 눈 위에 떨어지는 동백꽃, 어미 잃은 고양이가 밤새 우는 소리, 택시비를 아끼려고 동작대교를 걸어서 건너다 만난 아침 해. 예민한 마음만이 찾아낼 수 있는 아름다움의 조각들을 찾아내 조립해 보자. 그건 누구도 훔쳐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