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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제시카법’, 그리고 일상 속 위계와 성폭력

등록 2024-01-09 15:13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 2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국무회의장에서 열린 새해 첫 국무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고위험 성폭력범죄자의 거주지 지정 등에 관한 법률안, 이른바 ‘한국형 제시카법’이 1월2일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에 제출됐다. 이 법안에서 말하는 ‘고위험 성폭력범죄자’란 13살 미만 대상 또는 3회 이상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고, 그 성폭력 범죄로 10년 이상 징역형과 함께 전자장치 부착을 명령받은 이다.

앞서 직장, 가족, 학교, 군대, 온라인 공간에서 여성, 아동·청소년, 사회적 소수자를 성적 대상으로 삼아 괴롭히고 착취함으로써 통제하고 배제하는 문화를 멈추라는 ‘성폭력’ 명명과 대항행동이 있어왔다. 그런데 제시카법은 ‘고위험’이라는 상징과 기호를 강조한다. 그 대상도 매우 좁다. 국가가 일부의 ‘고위험군’에게 투영하는 사이에 현실은 어떻게 작동할까?

강간은 폭행 협박이 높은 정도이고, 피해자 저항이 극심했어야 인정된다. 가해자는 폭행 협박이 아닌 다른 수단과 수법으로 성폭력을 자행한다. 변호사 업계는 성범죄자 대상으로 이미 큰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가해자에게 유리한 결론을 위해 피해자 에스엔에스(SNS)를 털고 진술의 신뢰도를 낮추기 위해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는다. 피해자 나이가 적거나 장애가 있어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에게 불리한 탄원서를 수백장 모아 제출하고, 재판을 미루고 소송을 추가하면서 기간을 최대한 길게 늘어뜨려 상대방을 지치게 한다. 피해자 쪽 증인 포섭도 시도한다. 재판부는 법정형과 법적 제재가 높아질수록 형량을 선고할 때 주저한다.

제시카법은 ‘고위험군’ 성범죄자 형기 만료 뒤 거주지를 국가가 지정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 또한 누군가의 생활 터전이다. ‘고위험군’으로 상징화된 이들이 거주하는 시설을 지역 주민들이 환영하고, 운영에 협조할 수 있을까. 주민이 스스로 교육하고, 역량을 높이며 자치적으로 타인에 대한 성적 침해나 폭력을 목격했을 때 현장에서 함께 제지하고, 이후 피해자를 돕고 증언하게 될까. ‘고위험군’을 상징화하는 작업은 일상의 성폭력에서 시민을 멀어지게 한다. 평범한 이의 무력감은 커지는 사이, 국가는 더 높고 좁은 문을 만들어 일부 사람들을 가두고 성범죄가 마치 강력히 진압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지난해 11월 ‘제시카법’과는 다른 방향, 다른 시선과 속도로 성폭력 문제를 다룬 책이 나왔다. ‘안희정 몰락의 진실을 통해 본 대한민국 정치권력의 속성’이란 부제를 단 ‘몰락의 시간’이다. 저자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정무비서였던 문상철씨. 정치인 안희정과 사회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오래 일해오던 중, 2018년 여성 수행비서가 안희정으로부터 겪은 성폭력 사실을 밝히자 어느새 피해자의 조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국회에서 일자리를 잃었다. 일반 회사에 다니며 책을 썼다. 책은 안희정 성폭력 사건이 어떤 조직문화, 구조에서 나왔는지, 정치인 안희정이 초심을 잃고 무소불위의 자기중심성을 장착하게 된 과정과 연원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또 성폭력이 발생한 공간, 조건, 위치와 맥락이 다 사라지고 그 구조를 제일 잘 알았던 사람들이 나서서 피해자를 이상한 존재로 만들고, 신뢰성 없고 거짓말하는 이미지로 만들어 공격하는 식의 대응과 정반대의 길을 간다. 저자는 성폭력이 발생한 도청, 정치인, 선거캠프, 정치판에서의 문화, 관계를 하나씩 짚는다. 그리고 자신이 그 구조와 작동 방식을 형성한 사람 중 하나였음을 고백한다. 성폭력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자신이 가졌던 감정, 반응, 이후 행동, 고민, 맞닥뜨리게 된 상황도 빼놓지 않고 기록한다. 피해자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고, 보았던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행위가 어떤 대우를 받게 하는지 미화하거나 상찬하지 않고 기록한다. 성폭력이 발생했던 곳, 정치 영역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깊이 있는 방향을 제안한다.

가해자가 세번이나 성폭력 범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을 때까지 놔두고, 그 이후 거주지를 지정하고 제한하겠다는 식의 국가 대응이 유예, 책임 방기, 유체이탈로 느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시카법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보았던 성폭력을 함께 기록하고 복기하는 것 아닐까. 저자는 책을 쓰고 다니던 회사에서 권고사직됐다. 이래서 우리는 일상에서 아직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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