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살아보니 알겠더라. 때로는 포기하지 않고 버텨야 함을. 삶이란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아 순서가 바뀌기도 하지만, 그래도 천둥 번개의 시간을 견디면 반드시 해가 뜨더라. 다시 희망을 생각한다. 새해라서가 아니다. 절망의 정치를 끝내고 희망의 정치를 새로 시작할 때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극단의 정치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 정치가 사라지고 대립이 심해지고 공동체의 규범이 무너지는 민주주의의 위기다. 미국에서 한국에서 그리고 최근에는 아르헨티나에서 극단의 정치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와 경제의 양극화로 분열이 심해지고 정치에 대한 기대감이 낮아지면서 기존 정치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극단의 정치가 그 틈을 파고들어 혐오를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더 중요한 공통점도 있다. 극단의 정치는 낮은 투표율, 즉 유권자들이 정치에서 퇴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투표율이 낮은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혐오의 정치가 정치를 혼탁하게 해서 정치 참여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언론 지형이 기울어져 있으면,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선거 전략이 효과를 발휘한다. 다른 하나는 진보 개혁 진영이 희망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양극화로 거시경제 지표가 좋아도 삶은 고단하고, 개혁 정부가 출범해도 예외 없이 관료 기술주의에 빠지는 경험에서, 정치에서 더 나은 삶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민주당 대표에 대한 테러도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정치 폭력은 제도의 약화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주먹과 총이 아니라, 법과 절차에 따라 경쟁하는 제도다. 장내의 제도가 작동하지 않으면, 장외의 폭력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치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핵심은 민주적 제도의 작동이다. 대통령이 의회정치를 부정하는 한, 폭력의 문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절망은 반성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반성하지 않으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어렵다. 희망은 반성과 성찰의 땅에서만 꽃을 피운다. ‘희망의 정치’는 문재인 정부의 성과와 한계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 특히 한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윤석열 정부의 실정이 성찰의 필요를 방해하고 있지만, 더 나은 정치를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역사는 언제나 직선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에 대한 실망으로 미래의 희망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남북관계는 희망이 있을까? 관계의 악화는 선을 넘었고, 군사 대결의 악순환이 빨라지고 있으며, 평화적 해결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있다. 질서의 성격이 달라졌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이 시사점을 주기 어렵다. 다만 상황과 환경이 달라도, 위기의 순간에 기회의 창이 열렸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진보 개혁 진영은 민주화 이후 한번도 시도한 적이 없는 외교 안보 분야의 민주적 통제를 위한 제도 혁신을 준비해야 한다. 국제질서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달라진 남북관계의 역할과 기능을 재평가하고, 군사적 충돌을 예방하고 근본 문제의 장기적인 해법을 추구하면서, 그 과정에서 관계의 성격을 변경하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선거의 계절이 코앞에 다가왔다. 너무 많은 사람이 정치를 하려고 한다. 묻고 싶다.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는지, 정치를 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대결도 심해지고, 새로운 정치라는 명분으로 분열도 심해지는데. 차이의 내용을 알기 어렵다. 야당은 정권 심판 선거에 만족하지 말고, 더 많은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을 주기를 바란다. 저출산 고령화, 기후변화, 양성평등과 같은 핵심 과제의 근본적 대안을 제시해서, 젊은 세대의 정치 참여를 높이길 바란다.
선거에 나서는 사람들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혐오가 아니라 포용을,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시대의 과제를, 갈라치기가 아니라 사회적 아픔에 공감하는 정치를 하기를 바란다. 정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이다. 진정성이 없이 기술로 접근하면 감동을 주기 어렵고, 당연히 다수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
해가 바뀌어도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제위기의 폭풍 속에서 실존의 위기를 겪는 사람들에게, 군사적 긴장 고조로 걱정이 태산 같은 접경지역의 주민들에게, 희망을 기대하다가 절망의 현실을 겪었던 사람들에게 그래도 말해주고 싶다.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희망이다. 지금은 희망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