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헨리 키신저 (1923~2023)
독일 이름은 하인츠 키싱거였다. 15살이던 1938년 유대인 박해를 피해 일가족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헨리 키신저가 됐다. 유럽에 남은 친척 가운데 수용소에 끌려가 죽은 이가 많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군 병사로 나치와 싸웠고 전쟁이 끝난 뒤 하버드대에서 공부해 교수가 됐다. 1969년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 1973년 국무장관이 돼 세계를 쥐락펴락했다.
일단 그가 한 좋은 일. 평화와 질서를 위해 노력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 평화협상을 주선했다. 그해 파리 평화협정을 성사시켜 베트남에서 미국이 발을 빼도록 했다. 이 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평화상 수상에 반발하는 이도 많았다. 미국과 소련의 군축 협상도 이끌었다.
몹쓸 짓도 많이 했다. 캄보디아 무차별 폭격으로 민간인 수만명을 희생시킨 결과 폴 포트 정권이 들어서고, 칠레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며 피노체트 독재가 들어서고,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 독립운동을 총칼로 짓밟은 배경에 키신저가 있었다. 한반도에서도 1970년대 북한에 본때를 보이자며 키신저가 전쟁 위기를 키웠다고 이상돈 전 의원은 지적했다.
그 외에도 동아시아에서 키신저가 남긴 흔적은 크다. 미국과 중국의 역사적 화해의 배경에도 키신저가 있다. 밀사가 된 그는 기자들 눈을 속이고 파키스탄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여러분은 중국 공산당이 머리 셋, 팔 여섯 달린 괴물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저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미국 사절단을 두번째로 만났을 때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한 말이다. 키신저는 1977년 국무장관에서 물러나고, 이듬해 12월15일 미국과 중국은 국교 정상화를 발표한다.
키신저는 정치판을 떠난 뒤에도 책 쓰고 강연하고, 또 미국 정부에 조언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최근에는 미국과 중국 사이 갈등을 염려했다. 둘 사이 전쟁이 나면 “문명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올해 5월 100살 생일을 맞고 11월 말 세상을 떠났다. 미래는 그를, 그의 현실주의 외교를 어떻게 기억할까?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