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월1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열린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아침햇발] 황보연 | 논설위원
환경부가 일회용품 사용 규제 시행을 불과 보름여 앞둔 11월7일, 기존에 추진해오던 정책을 사실상 백지화했다. 플라스틱 빨대 규제 계도기간은 무기한 연장되고 종이컵 사용 금지 규제는 없던 일이 됐다. 한두달 전만 해도 규제 시행을 홍보해오던 환경부는 왜 돌연 입장을 바꿨을까. ‘소상공인 부담 해소’를 제목으로 앞세운 보도자료에는 어묵 국물을 종이컵에 담아 팔아온 붕어빵 사장과 학교 앞에서 컵떡볶이를 파는 분식집 사장 등의 민원 사례가 주된 근거로 제시됐다.
그런데 정부 규제 시행을 앞두고 다회용 컵과 종이 빨대 생산을 늘려온 또다른 소상공인들은 하루아침에 줄도산 위기에 빠졌다. 한 종이 빨대 제조업체 사장은 “환경부가 지방자치단체 등을 상대로 일회용품 사용 금지 지침까지 내려서 당연히 정책이 시행되는 줄 알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일관성을 잃은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도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런 정책 전환은 윤석열 대통령이 ‘민생 행보’의 일환으로 소상공인과 소통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려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0월30일 국무회의에서 참모들이 현장 방문 뒤 보고한 의견을 “민생 현장의 절박한 목소리”라고 강조했다. “마치 은행 종노릇 하는 것 같다”며 고금리 대출 상환 부담을 덜어 달라거나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식사비 한도를 올려달라는 등의 민원이 일일이 언급됐다. 급기야 외국인 노동자 임금을 내국인보다 덜 주도록 “국제노동기구(ILO) 조항에서 탈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억지 주장까지 소개됐다.
민원은 하나둘씩 선심성 정책이 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3일 현직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소상공인대회에 참석해 소상공인·자영업자에게 고금리 대출을 저금리 대출로 바꿔주는 특단의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특단의 ‘핀셋 지원’은 내년에 낼 이자 일부를 캐시백 형태로 돌려주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이 저금리 대출로 갈아탈 수 있도록 대환 프로그램이 가동돼 온데다, 또다시 이들에게만 이자 경감 혜택을 줘야 하는지를 두고 형평성 논란이 일고 있다. 윤 대통령은 과잉 공급과 과당경쟁이라는 자영업계의 고질적 문제에는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까.
민원은 심각한 정책 후퇴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통령실과 정부·여당은 3년이나 유예기간이 주어졌던 50명 미만 기업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다시 2년간 미루려고 한다. 지난해 재해 조사 대상 사망 사고의 60.2%가 50명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의 가장 큰 취지는 사업주의 경각심을 높이는 것이다. 다시 법 적용을 유예하면 그 취지가 무력화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돈과 인력을 들여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구축한 소기업들은 안중에도 없다.
확대 시행을 두달도 안 남기고 졸속 추진하다 보니 정부 안에서도 엇박자가 보인다. 지난 4일치 한 종합일간지에는 서울시와 고용노동부·환경부·국토교통부 명의로 ‘중대재해처벌법, 이렇게 준비하세요’라는 광고가 실렸다. 전날 당정대(여당·정부·대통령실) 회의에서는 관련 법을 2년 더 유예하기로 했는데, 정부 광고에선 50명 미만 사업주에게 법 시행을 기정사실화하고 준비 사항을 일러준 것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의 ‘바닥 민심’ 챙기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윤 대통령이 지난 6일 부산 깡통시장에서 재벌 총수들과 떡볶이를 나눠 먹은 장면은 이런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데 활용됐다. 문제는 선거용 민원을 챙기느라 정작 중요한 정책들은 실기할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윤 대통령이 취임 첫해부터 강조해온 노동·교육·연금 등 3대 구조개혁은 어디쯤 와 있나. 줄기는 놔두고 곁가지만 건드리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노동은 주 69시간 추진 논란만 벌이고 정작 중요한 임금 체계 개편이나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과제는 전문가 집단에 맡겨뒀다. 교육도 킬러문항 배제와 사교육 카르텔 척결에 힘을 빼느라 공교육 강화라는 몸통은 건드리지도 못했다. 얼마를 내고 받을지가 빠진 연금개혁안은 ‘맹탕’이라는 비난만 받았다. 대통령이 직접 추진 의지를 밝힌 의대 증원도 아직 구체적인 정부안을 내지 못했다. 최악은 정부 스스로 정책 불확실성을 너무 키웠다는 점이다.
임기 중반을 넘어서면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하는 구조개혁을 추진할 동력은 급격히 떨어진다. 기업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선 사회적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어렵다. 대통령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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