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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라면을 삶는다 [이종건의 함께 먹고 삽시다]

등록 2023-12-06 14:31수정 2023-12-07 02:37

컵라면. 필자 제공
컵라면. 필자 제공

이종건│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라면을 삶는다.”

들통에 라면 여러개를 끓일 때면 종종 ‘삶는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있었다. 한명 내지 두명 먹을 라면은 꼬들꼬들 취향껏 먹으면 그만이지만, 한번에 여러개를 조리하자면 오래 익히게 되기 마련이다. 고사리 삶듯 푹 삶은 모양에 그렇게 부르는가 보다 했다. 단체식사에서 라면을 삶아 먹을 요량이 아니라면 선택지는 하나뿐. 컵라면이다. 강제집행을 앞둔 동네의 배고픈 이들의 요기를 해결하는 일등공신도 컵라면이다. 바쁜 일상이든 다급한 상황에서든 한국인 손닿는 거리에는 늘 컵라면이 있다. 끓인다는 것도, 그렇다고 삶는다는 표현도 어색한.

보라색 풍선을 들고, 조끼를 입고 있는 공무원들과 시민들이 경찰 보호를 받으며 골목 어귀에 들어선다. 같은 풍경의 건물 십여채를 지나 골목과 골목이 만나는 지점, 교차로를 만난 행렬은 더는 나아가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서 골목 밖으로 빠져나간다.

“무릎 꿇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교차로에는 한 무리의 여성들이 무릎 꿇고 앉아 호소하고 있다. 1950년대 주한미군의 주둔 이후 형성된 성매매집결지 경기 파주 용주골의 최근 모습이다. 용주골 폐쇄를 선언한 파주시가 주최한 ‘걷기 행사’는 그렇게 사정 많은 동네 어귀를 돌아 사라졌다. 용주골의 종사자, 주민들은 각기 다른 사정을 가지고 집결지 강제폐쇄에 반대한다. 이미 쇠락하고 있는 동네라는 사실은 오랜 시간 그곳에서 살아온 이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공권력을 동원한 행정대집행이 예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동네 입구를 막아섰다. 용역과 경찰, 공무원들로 뒤섞인 무리 앞에 용주골 사람들이 서 있다. 서로를 언니, 이모, 막내라 부르는 사람들이 팔을 엮었다. 짓궂은 농담과 너스레로 용기 내보지만 이내 흐느끼는 이도 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 있는 이들이 감싸 안아 집으로 가라 한다. 울먹이며 “그럼 누가 지키느냐”는 말에 우리가 지킨다 말하고선 다시 너스레를 떤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이어지는 긴 대치상황, 오토바이가 김밥을 싣고 오고 이모들은 물을 끓여왔다. “컵라면 먹자!” 한마디에 긴장이 해소됐다. 그 틈을 노린 것인지 어떤 것인지, 대치하고 있던 인력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오랜 몸싸움에 용주골 사람들이 외친다. “라면 붇는다! 김밥 쉰다!”

얼룩이라 여기든, 자랑이라 여기든 70년간 때로는 조장되었고, 때로는 묵인되며 용주골은 존재했다. 없던 것이 갑자기 새로 생긴 것처럼 화들짝 놀란 척하며 용역을 들이민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그게 어디든 사람이 자국 남긴 자리는 그렇게 그냥 없던 것처럼 삭제될 수 없다. 그것이 사정 많은 동네라면 더더욱. 시장님 바쁜 일정에 컵라면 한사발 올라오지 않을 리 없다. 제아무리 번듯한 식탁이라고 컵라면 오르지 않는 집 어디 있을까. 사는 모양새 달라도 관통하는 것들이 있다.

동네 사람들에게 ‘이모’라 불리는 이가 시청에 고용되어 크레인 몰고 온 기사에게 컵라면 먹겠느냐고 소리친다. 간이 테이블 위에 라면이 삶아진다.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종사자들과 시민들에게 배달 가듯 컵라면이 쥐어졌다. 물이 끓고, 라면이 삶아지고, 한사발을 비운다. 그렇게 기운을 낸 동네 사람들은 다시 팔을 엮고 정면을 응시한다. 이곳에 아무것도 없었노라 말하고픈 이들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한다. 여기 사람이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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