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교육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수학능력시험 ‘킬러문항 배제’ 논쟁은 현행 입시제도를 둘러싼 각종 문제점이 다시 한번 공론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서울 서초구 한 초등학교 교사의 극단적 선택을 통해 공교육의 한 단면이 드러나면서, 교육주체들의 여러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들의 바탕에는 승자독식 사회의 그림자를 그대로 담고 있는 대한민국 교육 현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실해져 가는 공교육의 이면에는 갈수록 고도화, 효율화돼 번성하는 사교육이 존재합니다.
한겨레는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작가 10명과 손잡고 한국 교육의 현실을 소재로 한 미니픽션 10회 연재 ‘슬픈 경쟁, 아픈 교실’을 시작합니다. 격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이번 기획에는 장강명 정진영 주원규 한은형 최영 정아은 지영 염기원 서윤빈 서유미 작가가 함께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빛이 있으나 밝지 않았다. 지독한 안개에 싸여 있는 느낌이었다. 눈부신 터널을 통과한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윽고 남자는 어떤 존재와 마주하고 있음을 희미하게 알 수 있었다. 아! 그가 짧게 탄식했다. 내 아들 민준이구나. 맞지? 세상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아이를 안으려 뻗은 손이 허공을 갈랐다. 적응이 필요해요. 여기서는 아빠가 배워야 할 게 많아요. 당황하는 남자를 향해 아이가 희미한 미소를 보이는 것 같았다. 여전히 시각으로는 눈코입조차 구분할 수 없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본 아이의 모습은 선명하다. 25층에서 추락한 끔찍한 시신은 얼마 뒤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천국이 있었어. 역시. 그런데 민준아. 왜 텅 비어있는 거니? 지금은 안 보일 거예요. 제 뒤에 있는 자작나무 숲도, 회화나무 위에 있는 동박새도. 첨벙 소리 못 들으셨죠? 물오리 한쌍이 방금 시냇물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아빠 표정은 별로 좋지 않네요.
정작 시험에 나오는 중요한 건 제대로 외우지도 못하면서 자작나무니, 동박새니, 물오리니, 왜 그런 쓸데없는 거나 알고 있는 거니? 엄마가 알려줬어요. 쯧쯧쯧. 네 엄마도 그래. 그렇게 자식 교육에 신경 안 쓰는 여자가 강남에 몇이나 있겠니?
엄마 덕분이에요. 뭐라고? 아빠는 가난하고 게으르고 약한 것들과는 어울리지 말라 하셨죠. 더 세고 강한 상대와 경쟁해서 무조건 이기라고요. 엄마는 작고 약한 것을 사랑하랬어요. 살아있는 것들, 별과 달, 뺨을 스치는 바람에 경탄하라면서. 산이나 공원을 걸을 때마다 꽃과 나무, 조그만 동물들의 이름을 알려주셨어요. 엄마는 시인이잖아요.
시인? 감성적인 단어 몇개 붙여놓는다고 다 시가 되니? 천박한 지적 허영이야. 심심하면 다른 집 여자들처럼 골프나 치러 다니라니까. 세상은 총성 없는 전쟁터라고 했잖아. 너랑 네 엄마가 어떻게 명품 아파트에 살 수 있었니? 아빠가 서울대 나왔으니까! 대치동 일타강사니까! 강남에서 제일 잘나가는 학원을 차렸으니까!
그래서 아빠 삶은 어땠는데요. 술 드시고 매일 늦게 들어오셨잖아요.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요. 젊은 일타강사들이 자꾸 치고 올라와서 힘들다며 담배도 다시 피우셨잖아요. 온라인 강의 촬영 때문에 밤샌다고 하더니 그 수학 강사님 집에서 자고 온 적이 여러번인 것도 알아요.
아니, 민준아. 아니요. 괜찮아요. 그 얘기는 중요하지 않고요. 아빠,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경쟁도 사교육도 필요 없죠. 여기는요, 약한 사람들이, 바보 같은 사람들이 인정받는 곳이에요.
천국이 아니었구나. 그래. 자살한 애가 있는 곳이 천국일 리가 없지. 아니, 그러면 내가 지옥에 왔다고? 아니지. 지옥이라면 영원히 식지 않는 불구덩이일 텐데. 여긴 제법 안온하구나. 그러면 연옥? 여기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가는 거구나.
아니요. 아빠가 있을 곳은 여기 맞아요. 영원히. 그러면 여기가 천국이니? 그냥 우리가 살던 땅하고 똑같아요. 시공간 개념이 다르긴 한데 차차 배우게 될 거예요. 아빠는 제가 지금 계속 아빠 눈앞에 있는 것 같죠? 아니에요. 방금 동현이를 만나고 왔어요. 그 박 집사 아들? 아니, 걔도 일찍 죽었다는 거니?
아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오래오래 살았어요. 시공간 개념이 다르다고 했잖아요. 혼란스러우실 거 이해해요. 그런데 아빠, 저는 동현이가 가장 부러웠어요. 제가 학원 뺑뺑이 도는 동안 걔는 부모님 가게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잖아요. 그래서 아빠가 걔랑 놀지 말라고 한 거야. 못 배운 집안에, 공부도 못하고, 냄새도 나고.
그런데요. 동현이네는 여기서도 온 식구가 함께 지내요. 교회 사람들 중에 보기 드문 케이스죠. 초등학교 때 걔네 식당에 가면 뭐가 그렇게 좋은지 부모님하고 하하호호, 웃음이 끊이지 않는 게 참 부러웠어요. 잘나가는 학원 원장님보다 주방에서 땀범벅이 된 채로도 아들과 놀아주며 친구처럼 지내는 아빠가 더 좋아 보였거든요.
잠깐, 그러면 네 엄마도 여기에 있다는 얘기잖아! 네. 이제 조금 적응하시는 거 같네요. 어디에 있는데? 글쎄요. 엄마가 아빠를 보고 싶어 할 것 같지 않은데요.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니?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알아요. 약과 술에 취한 상태로 차를 모셨잖아요. 그러다가…. 민준아, 그게 말이야.
그 얘기는 더 안 할게요. 엄마는 이곳에서도 시인이세요. 여기서는 예술하는 사람이 제일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요. 들꽃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화가, 작은 생명에 감동하는 작가, 새들과 함께 소리를 빚는 음악가들 말이에요. 땅에서 사랑했던 것들을 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거든요.
시간이 흐르자 남자는 자기 눈에 있던 더께가 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민준아, 이제 보인다. 멀리 사람들이 보여. 네. 그런데 서로 뒷모습만 보일 거예요. 자신만 끔찍이 사랑하다 온 사람들은 여기서 누구보다 외롭게 살죠. 사랑하던 존재가 없으니 욕망하던 대상의 허상만 보는 거예요. 누군가의 뒷모습이라던가 쓸 곳 없는 지폐라거나.
아빠는 제 뒷모습 보는 걸 좋아하셨잖아요. 과외 선생님 앞에서 수업받는 뒷모습, 책상 앞에 앉아서 문제집 푸는 뒷모습, 휴일 오후에 학원 가느라 현관문 열고 나가는 뒷모습 말이에요. 저는 그냥 만화 그리는 게 제일 좋았는데요.
그건 명문대 들어간 다음에 해도 된다고 했잖아. 무슨 소용이 있어요. 고등학교도 못 가고 죽었는데. 학원을 다섯개나 다니면서 성적으로 줄 세우는 것에 완전히 지쳤어요. 기계처럼 문제 푸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고요.
웹툰 작가는 무슨 공무원이니? 어느 바닥이건 다 치열한 경쟁이 있는 거야. 공부가 가장 쉽다고 얘기했잖아. 아빠한테 물려받은 머리를 가지고 쓸데없는 짓이나 하려는데 내가 참을 수가 있니? 참아주셔야 했어요. 기다려주셨어야 했어요. 뭐라고? 엄마가 그랬어요. 상대가 실패하고 방황해도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여백, 그게 사랑이래요. 엄마는 늘 저를 기다려줬어요. 네 엄마가 기다리는 건 잘하지. 저보다 늦게 오는 아빠도 기다려야 했죠.
우리가 밤늦게까지 학원에 있는 동안 엄마 혼자 외로운 시간을 버티며 기다렸어요. 외롭기는, 다 한가한 소리지.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 여자가. 아니요. 우리가 필요했던 건 아빠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는데도요? 동현이는 이곳에서도 아빠와 함께 잘 지내지만 저는 그럴 수 없나 봐요. 그건 또 무슨 말이니? 이제 가야 해요. 저는 여기에 오래 못 있어요. 나중에 다시 만나요. 아빠가 저 다리를 건널 수 있기를.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좁고 긴 다리가 놓여있었다. 저 다리는 또 뭔데? 엄마와 제가 있는 곳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에요. 네 말은, 너하고 네 엄마는 다른 곳에 있다는 거야? 잠깐만. 네가 희미해지고 있어. 민준아! 기다려, 잠깐만! 이건 제 의지가 아니에요. 안내자가 저를 부르고 있어요.
아니, 왜 다들 바보같이 다리는 안 건너고 멀뚱멀뚱 눈치만 보고 있는 거야? 저 다리는 너무 약해서 딱 한 사람만 건널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누가 먼저 오르면 그 사람을 끌어내리려고 너도나도 뒤를 따라요. 그러면 다리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라앉아요. 웃기죠?
흐릿해지던 아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남자는 멍하니 다리를 바라보다 성큼성큼 그곳으로 향했다. 내가 누군데. 어떤 사람인데. 저까짓 녀석들 천명, 만명이 있어봐라. 내 상대가 되나. 그는 아직도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온기가 있으나 따뜻하지 않았다.
염기원 |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재학 중 벤처기업 세 개를 연달아 창업했다. 공중파에도 출연하며 주목을 받다가 글을 쓰겠다며 돌연 전국 일주를 떠났다. 대학 졸업 후 포털회사와 미디어랩사를 거치며 IT 노동자로 살다가 소설을 쓰기 위해 스타트업을 정리했다. 장편소설 ‘구디 얀다르크’, ‘인생 마치 비트코인’,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를 썼으며 ‘월급사실주의’ 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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