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물론 그 가족과 어머니와 아이들을 지워버려라. 그 짐승들을 더는 살려둘 수 없다. 이웃에 아랍인이 산다면 그가 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 사살하라. 절멸시키고 전진하라.”
이스라엘 최고령 예비군인 에즈라 야친이 10월14일 동영상에서 한 말을 읽으며 나는 문득 ‘그들’의 이름이 알고 싶어졌다. 에즈라 야친이 절멸시키라고 했던 그 어머니와 아이들의 이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다친 팔레스타인 여성이 13일(현지시각) 가자지구 남부 칸 유니스의 나세르 병원에 도착해 자녀들을 다독이고 있다. 이날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는 가자지구의 연료가 이틀 내로 고갈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칸유니스 AFP/연합뉴스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나는 전쟁이 무엇인지 안다. 전쟁은 무기를 든 군인들이 일정한 구역에서 벌이는 게임이 아니다. 눈앞에서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통이 깨지고 여자들이 집단강간을 당한 채 죽임을 당하고 이웃들이 한날한시에 다연발 기관총을 맞으며 죽어가는 게 전쟁이다.
전쟁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건 베트남에서였다. 호찌민시 전쟁증적박물관은 늘 여행자들로 붐빈다. 전쟁증적박물관이란 전쟁의 증거를 쌓아 만든 박물관이란 뜻이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전쟁의 증거를 쌓아 만든 박물관이라니, 씁쓸하고도 괴이쩍지만 전쟁증적박물관은 베트남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르는 곳이다. 네이팜탄이 떨어지는 도로 위를 발가벗고 달리는 소녀, 아이를 목에 매달고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는 가족들, 공중에서 쏟아부은 고엽제로 인해 초토화된 숲속에 홀로 서 있는 어린아이, 심장에 총구를 겨냥당한 노인, 죽기 직전 이들의 휑한 표정들…. 참혹하고 잔혹한 사진들 앞에서 나는 자꾸 눈을 감았다.
밀라이박물관은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에 있다. 1968년 3월16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마을에 세워진 박물관이다. 베트남전쟁(베트남 사람들은 이 전쟁을 ‘미국전쟁’ 혹은 ‘항미전쟁’이라 부르지만, 이 글에서는 미국과 베트남 사이에 벌어지고 한국군이 참전한 이 전쟁을 한국 사회가 익숙하게 부르는 베트남전으로 부르기로 한다) 때 다른 지역에서도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지만 밀라이 학살이 유독 전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사진 때문이다. 학살 전 과정을 마치 한편의 드라마처럼 찍어놓은 이 사진들은 전쟁, 특히 민간인 학살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작은 박물관에는 미군이 헬기를 타고 도착하는 순간부터 주민들을 집에서 끌어내는 장면, 학살하는 장면, 집에 불을 지르는 장면, 한곳에 모아놓고 사살하기 직전 장면, 우물에 빠뜨린 노인에게 총을 쏘기 직전 장면 등과 작전을 끝내고 담배를 피우며 웃는 미군, 통역으로 따라온 남베트남 군인들의 복잡미묘한 표정을 담은 사진까지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 사진들로 밀라이에서 벌어진 사건은 우발적인 교전이 아니라 치밀한 전쟁 범죄임이 드러났다.
사진을 찍은 이는 헤이벌리라는 미군 종군기자다. 그는 이날 필름 세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두통은 흑백필름, 한통은 컬러필름이었다. 학살 뒤 그는 흑백사진 40장을 군대에 건네고 18장을 남겨두었다. 18개월 뒤 이 학살에 대한 조사가 미국에서 이루어졌을 때 헤이벌리는 컬러사진 18장을 공개했다. 사진들은 미국과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원경이었던 전쟁이 불쑥 눈앞으로 다가왔고, 사람들은 전쟁의 맨얼굴을 대면할 수 있었다. 미국과 전세계에서 반전운동이 힘을 얻었다. 처음 밀라이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나는 사진들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구토를 하러 중간에 나와야 했다.
남부여성박물관에서는 전쟁에 관한 여성의 경험과 기억은 남성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남성의 시선에서 기록되고 해석되고 재현되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 베트남을 방문한 때는 전쟁이 끝나고 30여년이 지난 뒤였다. 강산이 세번 변하고도 남았을 시간이 흘렀지만 어떤 이들에게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박물관에 담기지 못한 이야기가 베트남 곳곳에 넘치고 흘렀다. ‘베트남전과 한국군’이라는 주제에 관한 취재를 하고 있었기에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여럿 있었다.
만삭의 배에 총을 맞은 릉티퍼이, 시체 더미 속에 숨겨져 있다가 살아남은 당티카(당시 세살이었다), 여전히 가슴에 사선으로 총탄 자국이 남아 있던 팜티메오, 총탄이 얼굴로 날아들어 턱과 혀가 날아간 응우옌티니….
“군인들이 우리를 일렬로 쭉 세웠는데 이모하고 할머니 빼고는 다 애들이었어요. 근데 우리를 일렬로 세우자마자 수류탄을 막 던지고 총을 쏘는 거예요. 그땐 내가 총을 맞았는지 아닌지 감각도 없었어요. 어린 내 동생이 쓰러지는 걸 보고 나도 곧 기절했죠. 눈을 떴을 때는 제일 먼저 오빠가 보였어요. 오빠는 하반신이, 엉덩이가 정말 다 날아가서 너덜너덜해져 있었어요. 그 옆에선 동생이 피를 울컥울컥 쏟고 있었고. 근데 내가 너무 어려서 동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오빠는 온몸이 너덜너덜 찢겼는데도 엄마 찾으러 가자고 하고, 동생은 어떻게 하냐 그랬더니, 그래도 엄마만 찾더라고요.”
전쟁 당시 여섯살이었던 응우옌티탄의 이야기다.
“그들은 물론 그 가족과 어머니와 아이들을 지워버려라. 그 짐승들을 더는 살려둘 수 없다. 이웃에 아랍인이 산다면 그가 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 사살하라. 절멸시키고 전진하라.”
이스라엘 최고령 예비군인 에즈라 야친이 10월14일 동영상에서 한 말을 한 시사주간지(‘시사인’, 2023년 10월23일치)에서 읽으며 나는 문득 ‘그들’의 이름이 알고 싶어졌다. 에즈라 야친이 절멸시키라고 했던 그 어머니와 아이들의 이름. 릉티퍼이, 당티카, 응우옌티니를 알았을 때 비로소 베트남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진실을 알게 됐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의 한가운데서 공포와 싸우고 있을 그 이름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의 이름이 없다는 걸. 핸드폰을 열어 ‘그들’의 이름을 검색했다.
자밀라 야스민 말라크, 그녀들의 말을 듣고 싶다. 네타냐후와 바이든과 하마스, 푸틴 말고.
하비바 주흐리 파티마 알리아,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어머니의 신음과 울부짖음은 그대로 내 살에 박혀 내가 되었습니다. 피부를 쓸어내면 거기 어머니의 비명이 묻어나고 귀를 파면 한움큼 어머니의 신음이 따라 나오지요. 어머니와 여동생의 주검은 마을 사람들이 묻어주었습니다. 나도 부상이 심했으니까. 돗자리에 말아서… 묻었습니다.”
빈딘성 떠이선현 떠이빈사에 사는 런의 말이다.
죽지 마 와르다, 죽지 마 아이샤, 죽지 마 라일라….
부디 살아남아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줘.
*마람(희망), 하비바(연인), 말라크(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