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양반들’과 드러머 김반장이 무당 박필수와 함께 해남 씻김굿 중 액막음 소리를 연주하고 있다. ‘새들의노래마을’ 제공
전범선|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지난 주말,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에루화헌에서 굿판이 벌어졌다. 에루화헌은 명상음악가 박양희씨가 인도 산티니케탄(평화의마을)에서 9년 동안 수행하고 돌아와 만든 아슈람(암자)이다. 우리 밴드 ‘양반들’은 지난해 4월 에루화헌을 처음 방문했고, 그곳에서 만든 음반 ‘에루화’를 올해 5월 발매했다. 시디(CD)를 들고 다시 찾아뵈었을 때, 양희보살은 무당 박필수씨를 소개했다.
나는 난생처음 무당을 만났다. 흔한 점쟁이도 찾아간 적이 없다. 미국과 영국에서 철학사를 전공하면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와 신앙을 경계했다. 신을 믿은 적도, 귀신을 본 적도 없다. 그래서 목사든 스님이든 신부든 무당이든 관심 없었다. 다만 음악가로서 풍류를 찾아다녔기에 굿판은 한번쯤 보고 싶었다. 무당도 결국 뮤지션 아닌가? 설교가 아닌 춤과 노래로 신을 만난다는 점이 분명 특별했다. 나는 종교인이 아닌 선배 음악가로서 박필수씨를 대했다.
그는 단골무당이라고 했다. 단골손님은 알아도 단골무당은 몰랐다. 게다가 남도에서 보기 드문 남자 무당이었다. 서울에서 사회운동을 하다가 87년 6월 항쟁 이후 해남 땅끝마을에 돌아왔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노동해방, 통일운동을 했는데 혁명으로는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작은 것도 나누는 어릴 적 고향 마을의 분위기가 그리웠다. 그나마 굿판에는 그런 것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신엄마를 모셨고, 신내림도 받았다.
미신타파 운동으로 단골들이 사라졌지만, 원래 마을마다 단골무당 가족이 있었다. 단골은 마을 사람들의 사주팔자를 꿰고 있었다. 관혼상제를 주관했으며 아픈 이를 상담하고 치유했다. 심지어는 가축이 아파도 단골이 출동했다. 한마디로 공동체가 잘 먹고 잘살도록 치성을 드리는 것이 단골의 역할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단골을 먹여 살릴 의무가 있었다. 이 땅의 뿌리 깊은 사회계약이다.
땅끝 해남은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골무당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박필수씨는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담담히 들려주었다. 나는 선배 음악가 김반장씨와 함께였다. 우리는 “필수 형”에게(그는 선생님보다 형으로 불리길 바랐다) 같이 잼(jam)을 하자고 졸랐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일단 같이 연주해보면 상대방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양반들’의 서양식 밴드 악기 구성에 굿 장단과 소리가 어우러지면 어떨지 궁금했다. 무대와 관객의 경계가 없는 공연으로서 굿도 체험해보고 싶었다. 백남준이 스스로 “전자 무당”이라 칭하면서 플럭서스 행위 예술과 굿을 연결 지은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음식은 전부 채식으로 준비했다. ‘새들의노래마을’ 제공
60년대생 무당과 90년대생 밴드가 합을 맞추고자 하니 자연스레 대동굿이 열렸다. 에루화헌을 중심으로 구성된 문화예술공동체 ‘새들의노래마을’이 주최하고 흐름, 작은가배, 모두가씨앗 등 서울 기반의 청년 예술 프로젝트가 합세했다. 나는 한가지 부탁드렸다. 한복 입고 돼지머리 바치고 작두 타는 굿은 하기 싫었다. 한반도, 나아가 지구촌 생명 공동체의 해원상생을 위한 굿을 하고 싶었다. 기후생태 위기의 시대, 지구촌이 한마을이고 뭇 생명이 한식구 아닌가? 우리는 한복 대신 파자마를 입고 로큰롤과 레게, 소울과 펑크 음악 위에 풍물굿을 했다. 음식은 전부 채식으로 준비했다. 필수 형은 모름지기 무당이란 공동체의 흐름에 맞춰 살아 있는 굿을 해야 한다면서 독려했다. 넋올리기 때는 사람 모양뿐만 아니라 개 모양 지전도 등장했다. 음악적으로, 연출적으로 아방가르드한 해프닝이었다.
한류와 풍류가 만나는 자리. ‘새들의노래마을’ 제공
100여명의 참여자 중에는 라트비아, 튀르키예(터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미국 등 총 10개국 사람들이 있었다. 한류와 풍류가 만나는 자리. 나는 한국 샤머니즘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이미 서양 사상계는 계몽주의 해체를 마치고 만물을 신령스럽게 보는 샤머니즘에 주목하고 있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모든 생명과 기계, 비인간 존재를 주체로 상정한다. 한반도의 뿌리 깊은 토속 신앙, 민중 신학에 문명 전환의 씨앗이 있다. 신명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굿판을 벌이자. 음식과 음악을 나누고 춤과 노래로 하나 되자. 하늘과 땅을 잇는 지구촌 단골무당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지속가능한 신문명에 가까워질 것이다.
(해남 에루화헌에서 신명나는 굿판. 영상 크리스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