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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오철우의 과학풍경] ‘생명이란 무엇인가’ 다시 묻는 물리 이론

등록 2023-10-31 18:51수정 2023-11-01 02:41

조립 이론(Assembly theory)은 생명 분자를 레고 조립에 비유해 물질 부품(빌딩 블록)의 조립체로 설명하곤 한다. 단백질처럼 매우 복잡한 고분자의 출현은 생명체가 시간, 역사, 우연의 정보를 자신의 물질에 새겨 넣어 기억할 줄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림 Anna Tanczos/Sci-Comm Studios, CC BY-SA.
조립 이론(Assembly theory)은 생명 분자를 레고 조립에 비유해 물질 부품(빌딩 블록)의 조립체로 설명하곤 한다. 단백질처럼 매우 복잡한 고분자의 출현은 생명체가 시간, 역사, 우연의 정보를 자신의 물질에 새겨 넣어 기억할 줄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림 Anna Tanczos/Sci-Comm Studios, CC BY-SA.

오철우 | 한밭대 강사(과학기술학)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으로 널리 알려진 에르빈 슈뢰딩거(1887~1961)는 양자역학으로 노벨상을 받은 저명한 물리학자이지만, 생물학의 주제를 다룬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1944)의 저자로도 널리 알려졌다. 디엔에이(DNA)의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도 그는 과학은 통한다는 믿음으로 당대 물리학과 화학 지식을 통해 ‘놀라운 기적’ 같은 유전물질의 구조와 속성을 추론하고 예측했다. 나중에 밝혀진 디엔에이와 유전암호의 과학은 생물학의 경계를 넘나든 양자물리학자의 통찰이 의미 있는 도전이었음을 말해준다.

요즘 생명과 진화를 새로운 물리화학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조립 이론(Assembly theory)이 관련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2012년부터 공동연구를 해온 영국의 리로이 크로닌 교수와 미국의 세라 워커 교수가 주창자인데, 최근 ‘네이처’에 ‘선택과 진화를 설명하는 조립 이론’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영향력을 넓혀왔다.

왜 세상에 어떤 분자는 존재하고 어떤 분자는 존재하지 않을까? 조립 이론은 이런 물음에서 시작한다. 이론적으로 무수한 경우의 수에 비하면 세상에는 아주 적은 종류의 객체들만 존재한다. 왜 그럴까? 이론 주창자들은 물질 조립이 시간을 초월하는 물리법칙만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실제 시간 세계의 조립 공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조립의 과학은 물리법칙뿐 아니라 시간, 역사, 우연과 선택 경로까지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조립 이론에 의하면, 단백질처럼 복잡한 고분자의 출현은 생명체가 무생물과 달리 시간, 역사, 우연의 정보를 자신의 물질에 새겨 넣어 기억할 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조립 이론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초점을 유전자, 단백질의 문제에서 물질 조립의 복잡성 문제로 바꾼다. 그래서 생명의 정의는 지구 생물학 너머 우주로 일반화한다. 외계 생명체는 지구의 조립 공간에서 다뤄지는 생물학으로는 예견할 수 없는 아주 다른 존재일 수 있고, 그렇기에 외계 생명체 탐색의 표적은 우리가 아는 생명 분자의 종류가 아니라 물질 조립의 복잡성 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연구자들은 분자가 거쳐야 하는 조립 단계의 수를 측정하고 조립 지수라는 수치로 나타냄으로써, 조립 지수가 무생물과 생명 분자를 식별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

흥미로운 점은 조립 이론에 담긴 새로운 관점이다. ‘네이처’에 실린 해설 논문은 기존의 주류 관점이 어떤 객체를 정의할 때 구성 성분을 따지는 데 비해 조립 이론은 조립 공간에 놓인 가능한 역사를 따져 객체를 정의한다는 점에서 아주 다른 물리학이라고 평했다. 초기 조건을 알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결정론에서 벗어나려 한 점도 큰 차이다.

조립 이론은 아직 검증 무대에 선 학설일 뿐이다. 주창자들은 실험실에서 검증할 수 있는 과학 이론이라고 주장하지만, 생명을 더 잘 설명하는 새로운 과학인지를 두고 여전히 논란도 이어진다. 다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생물학, 물리학의 경계를 넘어선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사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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