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교육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수학능력시험 ‘킬러문항 배제’ 논쟁은 현행 입시제도를 둘러싼 각종 문제점이 다시 한번 공론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서울 서초구 한 초등학교 교사의 극단적 선택을 통해 공교육의 한 단면이 드러나면서, 교육주체들의 여러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들의 바탕에는 승자독식 사회의 그림자를 그대로 담고 있는 대한민국 교육 현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실해져 가는 공교육의 이면에는 갈수록 고도화, 효율화돼 번성하는 사교육이 존재합니다.
한겨레는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작가 10명과 손잡고 한국 교육의 현실을 소재로 한 미니픽션 10회 연재 ‘슬픈 경쟁, 아픈 교실’을 시작합니다. 격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이번 기획에는 장강명 정진영 주원규 한은형 최영 정아은 지영 염기원 서윤빈 서유미 작가가 함께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허생은 대치골에 살았다. 곧장 한강을 건너 양재천 근처에 닿으면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서 있고, 그 아파트 단지를 향하여 철제문이 열렸는데, 두어 칸 빌라는 비바람을 겨우 막을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글 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명품 수선 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하였다.
하루는 처가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고시를 보지 않으니 글을 읽어 무엇합니까?”
허생이 웃으며 답했다.
“나는 아직 공직에 나아갈 만큼 독서에 익숙하지 않소.”
“그럼 의전원 시험이라도 보지 못하시나요?”
“나는 주사바늘만 봐도 기겁하거늘 어찌 의원이 될 수 있겠소?”
“그럼 변시라도 보지 못하시나요?”
“문송할 따름이오.”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글을 읽더니 대답이 기껏 ‘못 한다’는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의원도 못 한다, 변리사도 못 한다면 로스쿨에 진학해서 변호사 자격이라도 못 따시나요?”
허생은 읽던 책을 덮어 놓고 일어났다.
“아깝다. 내가 당초 글 읽기로 십년을 기약했는데, 인제 칠년인 것을….” 하고는 획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생은 거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은행을 찾아가 주택담보대출을 신청했다. 조건이 애매하였지만 허생의 기개에 감복한 지점장 변씨가 대출을 승인하였다. 얼마 후 대출된 돈을 들고 허생은 곧바로 신도시 모처로 가서 학원을 차렸다. 그의 현란한 강의술은 사방으로 소문이 났고, 일타 강사인 허생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백만냥의 돈을 벌었다.
학원을 정리한 후, 허생은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그러고도 은이 십만냥 남았다.
“이건 은행에 갚을 것이다.”
허생이 은행으로 가서 지점장을 보고, “나를 알아보시겠소?”라고 묻자, 지점장 변씨는 놀라 말했다.
“그대의 안색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혹시 만냥을 실패 보지 않았소?”
허생이 웃으며, “재물에 의해서 얼굴에 기름이 도는 것은 당신들 일이오. 만냥이 어찌 도를 살찌우겠소?”라고 답한 뒤 십만냥을 변씨에게 내놓았다.
“내가 하루아침의 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글 읽기를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으니, 당신에게 만냥을 빌렸던 것이 부끄럽소.”
변씨는 본래 예조 관원인 이완과 잘 아는 사이였다. 이완이 당시 예조 참판이 되어 변씨에게 위항이나 여염에 혹시 ‘사교육과 경쟁교육의 폐단’을 해결할 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변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완이 깜짝 놀라면서, “그이는 이인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라고 말했다.
밤에 이완은 수행비서들도 다 물리치고 변씨만 데리고 허생을 찾아갔다. 변씨는 이완을 문밖에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 허생에게 이완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하고, “당신이 갖고 온 술병이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즐겁게 술을 들이켜는 것이 아닌가. 변씨는 이완을 밖에 오래 서 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야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였다.
이완이 방에 들어왔건만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이완이 몸 둘 곳을 몰라 하며 나라에서 어진 인재를 구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느냐?”
“참판이오.”
“그렇다면 너는 조정의 신임을 받는 인사로군. 내가 와룡 선생 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조정에 아뢰어서 삼고초려 하게 할 수 있겠느냐?”
이완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이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허생은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을 모른다.”라고 말하며 외면하다가, 이완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결국 사교육과 경쟁교육이 문제되는 것은 대학입시 때문이 아니겠는가? 대학이 없다면 입시도 없을 것이고, 입시가 없다면 경쟁교육도 없고, 사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을 터이니, 너는 조정에 청하여 대학제도를 금하는 명을 내리도록 할 수 있겠느냐?”
이완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아무래도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무릇 천하에 대의를 외치려면 먼저 사교육과 경쟁교육의 핵심이 무엇인지 밝혀야 하는 법이니, 그 핵심은 바로 ‘획일적인 상대평가’에 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와 역도 선수를 동일한 잣대로 평가하여 등수를 매기는 데서부터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획일적인 상대평가를 완화해 보겠다고 도입한 수시 전형마저 비리로 얼룩져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었으니 참으로 진퇴양난이 아니더냐. 그러니 아예 교육의 ‘본(本)’으로 돌아가 다른 아이와의 비교 없이 한 아이의 학습수준만을 ‘그대로’ 평가함이 옳다. 그대로 평가함은 바로 절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성취기준을 미리 수·우·미·양·가 다섯 등급으로 나눈 뒤 그 아이가 어디에 해당하는지만 밝히면 되니 이 어찌 간편하고 합리적인 방안이 아니라 하겠느냐? 대학입시 또한 공동입시제를 시행하여 인문사회계열은 국어·사회 과목 성취도가 우수한 학생이 이공계열은 수학·과학 과목 성취도가 우수한 학생이 학교와 학과를 삼세번 지망하여 추첨을 통해 배정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원하는 학과는 학업 성취도 절대평가에 따라, 원하는 대학은 운에 따라 갈리는 것이니 대학 서열화라는 폐단을 근본적으로 방지할 수 있다.”
이완은 힘없이 말했다.
“대학은 학생들의 성적 변별력을, 학생과 학부모는 대학의 평판 변별력을 원하는데 누가 추첨을 통한 대학입시를 반기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도대체 대학이 무엇을 하는 곳이란 말이냐? 오랑캐 땅에서 자칭 명문이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잘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잘 뽑는 것을 명문의 예법이라 한단 말인가? 학벌사회의 문제는 입학은 어렵고 졸업이 쉬운 데 있다. 그래서 졸업장보다 합격증을 더 알아주고, 이름 있는 대학 중퇴는 학력이 되는 반면 오히려 편입생은 차별하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대학원을 졸업하고 석·박사 학위를 받아도 결국 ‘학부는 어디 나오셨어요?’라는 질문을 받는 것이 나라의 현실이다. 입학과 편입과 전과가 쉽고, 반대로 졸업이 어렵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진로에 유동성이 생기고, 사회에 효율이 돌고, 나라에 활력이 생길 수 있다. 번오기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머리를 아끼지 않았고, 무령왕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되놈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 교육을 바로 세우겠다 하더니, 그까짓 절대평가 제도 도입과 대입 제도 개편을 관철시키지도 못하면서 백년대계를 입에 담는단 말이냐? 내가 세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받는 공복이라 하겠는가? 너 같은 자는 혼이 좀 나야 한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더니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이완은 급히 현관으로 뛰쳐나가 도망하여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
최영 | 소설가. 장편소설 ‘로메리고 주식회사’로 제7회 수림문학상을 수상했다.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최정화의 ‘운경고택’ 전시에 맞춰 문학과 미술을 결합한 메타픽션 ‘춘야(春夜)’를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다. 월급사실주의 동인 소설집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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