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9일 충북 청주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생명과 지역을 살리는 필수의료혁신 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조혜정 | 정치팀장
‘애니싱 벗 문’(Anything But Moon, 문재인만 아니면 돼)
윤석열 대통령을 지켜보면서, 이 문구를 떠올린 게 나뿐만은 아니었을 거다. ‘문재인이 미워서 대통령이 됐고, 대통령이 된 뒤엔 싫은 티 팍팍 내며 그가 했던 모든 걸 뒤집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간들이었다. 급기야,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엔 “공산 전체주의” 딱지를 붙이며 혼자만의 이념전쟁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여권 내부에서조차 비판과 우려가 쏟아졌지만, 윤 대통령은 귀를 닫고 오직 자신만 옳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 결과가 지난 11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의 국민의힘 참패다.
며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던 윤 대통령은, 보선 일주일 뒤인 18일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우리가 민생 현장에 더 들어가 챙겨야 한다”고 했다. 전날 “반성도 좀 많이 하겠다”고 말한 사실도 이날 공개됐다. 그간 선보인 ‘뚝심’에 비하면 수줍은 표현이지만, 변화를 예고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윤 대통령은 ‘의과대학 정원 확대’ 방침을 밝혔다. 2025학년도 대학입시부터 적용하겠다며 시한도 못박았다. 얼마나 늘릴지 구체적인 수치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나, 현재 의대 정원(3058명)의 3분의 1 수준인 1천명가량은 늘려야 한다는 요구와 기대감이 크다.
윤 대통령이 ‘반성’을 언급한 뒤 내놓은 첫 정책이, 문재인 전 대통령이 하려던 일이라는 점은 꽤 흥미롭다. 정무적으로 보자면, 국민적 지지와 공감대가 높고, 더불어민주당의 협조도 비교적 원만하게 이뤄지리라는 판단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전 정부 뒤집기’에 사명감을 느끼는 사람처럼 굴었던 처지에선 ‘문재인 정부 때 추진했던’이라는 꼬리표가 달갑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윤 대통령은 지난 19일 의대 증원 방침을 밝히면서 “의료 남용을 초래할 수 있는 보장성 확대에 매몰되어 의료서비스 전달체계를 개선하고 인력 수급을 원활하게 하는 구조 개혁이 지체돼 아쉽다”며 전 정부에 화살을 돌렸다. 무엇보다, 단 한차례도 ‘공공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의료 공공성은 국민의 보편적 의료 이용을 보장하는 것이고 그 출발은 공공의료인데, 윤 대통령의 구상에는 그게 빠진 것이다.
사실, 지난 정부 정책이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추진방안’이었던 데 비해, 이번엔 ‘필수의료 혁신전략’으로 방점이 다르게 찍혀 있다. 의대 정원을 얼마나 늘릴지, 어디를 어떻게 늘릴지는 아직 밑그림이 나오지 않은 반면, 의료사고 때 법적 위험 부담 완화와 건강보험 수가 인상 등 필수의료 분야 인력 유인책은 비교적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부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한국의 공공의료 비중은 의료기관 수로 5.2%, 의사 인력으로 10.2%에 그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꼴찌다. 민간·대형병원 중심으로 의료시장이 굴러가는 현실의 보완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의사를 아무리 늘려도 민간병원이 흡수한다는 얘기다. 지역 간 의료 격차와 수도권 쏠림 역시, 의대생을 선발할 때부터 지역에 정착할 의사 육성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하지 않으면 해소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증원할 400명 가운데 300명을 ‘지역의사 전형’으로 뽑아 의사면허 취득 뒤 해당 지역의 공공의료기관 또는 중증·필수의료 기관에서 10년 동안 의무복무하게 하고, 공공의대를 신설하는 안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의료 공공성을 확보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받았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은 국가와 정부가 존재하는 첫번째 이유”이고 “의료 혁신의 목적은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성공하면 온전히 ‘윤석열표’가 된다. 이미 흘러간 정부와 싸우는 건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는 반지성주의”(윤 대통령 취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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