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전국순회 ‘평등버스’ 모습. 필자 제공
[나는 왜 NGO] 장예정 | 천주교인권위원회 상임활동가
친구들이 한창 진로를 고민하고 결정하던 20대 중반, 나는 비교적 일찍 직업을 선택했다. ‘인권활동가’다.
학창 시절 모범생인 편이었지만 부당함은 참지 않는 난감한 학생이었다. 지각한 적은 한번도 없지만,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돼 ‘야간자율학습’이 진짜 ‘자율’이 되었는데도 종례 뒤 8교시까지 남으라는 행태에는 참지 않았다. 나는 학교, 반, 번호, 이름까지 이야기하며 교육청에 제보했다. 장학사가 학교에 다녀갔고 선생님들 사이에서 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이후, 학교는 더 이상 종례 이후 남고 싶어 하지 않는 학생을 붙잡지 않았다. 전교 등수로 몇십명에게만 독서실 책상이 있는 자습실 자리와 보충자료를 주는 특별반이 운영되었다. 어느 학기에 특별반 석차가 되었지만 성적으로 차별하는 일은 이제 조례로 금지되었으니 나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굳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 상황이 부당하다는 감각과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의’를 업으로 삼을 생각까진 없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10여년이 지난 지금의 나 역시 소속과 이름을 밝히며 부당함을 지적하는 일을 하고 있다.
‘상임활동가’라고 적힌 명함을 받아들기 전부터 ‘활동’의 언저리에 있었기에 지금의 일이 낯설지 않았다. 보도자료를 만들고,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이런저런 글을 쓰는 일 모두 익숙했다. 다만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인권운동은 세상의 많은 아픔들을 가까이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급작스러운 부당해고에 맞서는 노동자, 평범한 연애와 결혼이 엄청난 일인 성소수자, 투쟁이 삶이 된 유가족들….
활동가로 살아온 지난 6년의 세월, 평범한 일상을 짓기가 어려운 이들을 만났다.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제도를 만드는 일은 억울함, 분노, 죽음이 늘 곁에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잃고 슬퍼하는 이들과 눈물 흘리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활동가가 되고 익숙해진 것은 성취와 존엄보다는 상실과 슬픔이었다. 부당함을 지적하고 함께 분노하는 일은 타고난 기질이었지만, 사회가 견고히 쌓아놓은 한계의 벽에 부딪혀 넘어지는 날에는 나의 그런 적성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른 활동가들처럼 평범한 직업을 가진 또래들과 비교해 보며 마음이 헛헛해지기도 한다. 아무리 이 일이 좋아도 밥 먹듯 하는 야근과 주말 일정, 정서적 피로, 높은 노동 강도에 비해 현저히 낮은 임금 등은 우리를 허무하게 하곤 한다. 그럼에도 우리 각자 여기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나는 우연히 담당하게 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그 이유가 되었다. 운동에 이토록 열과 성을 다하여 뛰어들게 된 것은 평등이라는 사회의 안전망을 기필코 만들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사랑도 노동도 죽음도 불평등한 각자도생 사회에서 평등 없이는 평범할 수 없음을 목격했고 실감했다.
존엄하고 평등한 세상을 다져나가는 활동가의 길을 택한 나의 작은 바람은, 이 일이 친구들이 각자 자기 몫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데 든든한 기반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1년에 한두번 시간 내어 얼굴을 마주하기도 녹록지 않은 친구들. 나에게 인권운동은 그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 일이다. 그들의 오늘이 별일 없이 평범할 수 있다면, 나는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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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의 시대 나는 왜 공익활동의 길을 선택했고, 무슨 일을 하며 어떤 보람을 느끼고 있는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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