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코트에서 열린 ‘한국의 대화’에서 참석자들이 1 대 1 대화를 나누고 있다. 빠띠 제공
이봉현 I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이 글은 한겨레 경제사회연구원이 우리 사회의 진영 갈등에 주목해 지난 6개월간 실험한 ‘한국의 대화’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입니다.
국제질서가 요동치며 여기저기서 갈등과 대립, 전쟁 소식이 들려옵니다. 정치는 미국, 유럽 등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란 곳도 예외 없이 적대와 혐오, 진영대결로 얼룩지고 있습니다. 수십년간 악화한 불평등과 소외에 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화가 나 있습니다. 그 화를 약자에게 겨눠 혐오와 배제의 칼날을 날립니다. 정치와 언론은 갈라치기로 갈등을 부추겨 이익을 얻습니다. 분열과 대립이 방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한 번 더 지적하느니, 해결에 보탬이 되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 간의 만남과 대화에 눈이 갔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만남이 적대와 혐오를 이길 수 있을 것’이란 가설을 세웠습니다. 진영의 골이 깊어지는 데는 불편한 사람 안 만나고, 끼리끼리 모여 편견을 굳히는 문화가 있다고 봤습니다.
국외 사례가 참고됐습니다. 독일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 가 2017년부터 해마다 여는 ‘독일이 말한다’ 프로젝트였습니다. 이는 ‘유럽이 말한다’, ‘세계가 말한다’로 확대돼 지금까지 연인원 30만명이 참여한 대화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겨레는 성공모델을 세계로 확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이 컨츄리 톡스’(My Country Talks) 사무국과 지난해부터 접촉해 국내 첫 협력 언론사로 등록했고, 한국에서의 행사 계획도 논의했습니다.
마침내 9월23일 인사동의 한 문화공간에서 46명이 참여한 1대1 대화가 열렸습니다. 참가자 모집과 진행은 사회적 협동조합 빠띠가 함께 했습니다. 사전등록 단계에서 ‘남북한이 같은 민족이기에 통일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나요?’ 등 10개의 질문을 준 뒤, 의견 차이가 큰 참가자끼리 짝을 지었습니다. 존중하고 경청하는 대화를 해 달라는 당부도 대화에 들어가기 전에 했습니다.
저도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는데요, 제 짝은 29살 청년이었습니다. 아들뻘인 그와 저는 여러 질문에서 생각이 달랐지만, 80분 동안 집중하며 이야기를 나눠 보니 “서 있는 지점이 다르면 저렇게 생각을 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론 뒤 모여 작성한 설문조사를 보면 다들 비슷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대화를 통해 기존 생각에 변화가 생겼냐’는 질문에는 10점 척도에서 긍정과 부정의 중간 수준인 5.2 점이 나왔습니다. 반면 ‘나와 다른 의견에 대해 정서적 공감도와 이해도가 증가했느냐’에는 8점이란 높은 긍정 응답이 나왔습니다. ‘이런 행사가 열린다면 또 참여하고 싶으냐’는 질문에도 긍정 응답이 9.2점에 이르렀습니다.
10월11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14회 아시아미래포럼 ‘한국의 대화’ 세션에서 전문가들이 생각이 다른 사람이 만나 나누는 대화의 의미와 필요성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한겨레 경제사회연구원
우리는 이런 대화가 공동체와 민주주의에 주는 의미를 짚어보기로 했습니다. 11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14회 한겨레 아시아미래포럼에 ‘한국의 대화’ 세션을 만들어 전문가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몇 대목을 인용합니다.
“적대적 민주주의 해소를 위해 정책결정자와 시민의 토론이 필요하다. 단, 시민 간의 소통이 전제되지 않으면 정책결정자와 시민의 토론만으로는 집단지성이나 공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극단적 의견을 배제하고 공론장으로 나가려면 나의 지각, 지식, 선택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삶의 다양성은 많이 증가했지만 모두 고립되어 홀로 외치는 모양새이다. 다양성이 발휘되기 위해서도 직·간접적 만남과 연결이 늘어나야 한다.” (설동준 문화기획자)
“대화 상대의 표정과 느낌을 통해(…) 대화 전후가 상당히 달랐고, 이런 파장, 온도를 만든 것이 대화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권민희 뉴닷 편집장)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라는 낯섦과 새로운 시도에 마음을 내주려는 시민들이 있다는 것을 발굴한 것도 큰 소득이었다. 인터넷의 역기능을 얘기하지만 온라인이 그런 만남의 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황현숙 빠띠 이사)
이제 우리의 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겠다는 믿음이 조금 더 커졌습니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말싸움,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는 배틀이 아니라, 오가는 말이 마음에 공명하는 대화 말입니다. 혹, 불평등과 불공정 구조를 놔두고 대화 몇 번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대화가 ‘만능열쇠’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경제, 분배제도를 택하느냐도 정치의 일이고, 그 정치의 질은 공론장이 어떤 상태냐에 달려있다고 우리는 봅니다.
우리는 이번 실험을 바탕으로 내년에 토론을 확대해 가려 합니다. 횟수도 늘리고 전국 단위로 치를 수도 있습니다. 세대, 성, 지역 등 결을 달리해서 대화의 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한겨레 혼자 할 일은 아닙니다. 정치성향이 다른 언론사나 시민단체의 동참을 환영합니다. ‘독일이 말한다’도 중도 좌인 ‘디 차이트’가 시작했지만 진보·보수를 어우르는 언론사가 함께 주관하는 행사로 전환했습니다.
생각이 달라도 만나고 경청하는 문화가 확산해, 병들어가는 공동체와 민주주의가 생기를 찾길 바랍니다.
bh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