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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종건의 함께 먹고 삽시다] 궁중족발, 그 후 5년

등록 2023-10-11 15:56수정 2023-10-12 02:40

궁중족발 간판이 떼어진 자리에 보이는 ‘주거니 받거니’ 옛 포장마차의 흔적. 지금도 가게자리는 공실로 비어있다. 박김형준 작가 제공
궁중족발 간판이 떼어진 자리에 보이는 ‘주거니 받거니’ 옛 포장마차의 흔적. 지금도 가게자리는 공실로 비어있다. 박김형준 작가 제공

이종건 |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국수를 끓인다. 잔치국수라면 으레 들통에 팔팔 끓여 여러 사람이 나눠 먹는 장면이 연상된다. 첫 국물을 받은 이는 마지막 국물을 받는 이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사이 면은 조금 불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맛이다. 이런 여유 탓일까. 국수를 끓인 날이면 둘러앉은 이들의 표정도 한소끔 끓인 것 마냥 풀어져 있다. 먹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 국물 우려낸 시간에 비하면 섭섭할 만큼 간단한 식사다. 그래도 진한 멸치 냄새만큼은 금방 가시질 않고 자기주장을 한다.

국수 잔치는 그렇게 냄새로 각인된다. 바쁜 일상, 인파에 치이며 길을 걷다 어디 국숫집에서 멸치 냄새 한줌이라도 코끝을 스치면 국수 끓이던 날이 생각난다. 냄새로 기억하는 음식들이 있다. 시각보다도 강렬한, 어쩌면 혀의 기억보다 더 정확한 후각의 기억. 골목 곳곳 점심이면 경쟁하듯 고등어 굽는 냄새, 제육 볶는 냄새, 김치찌개나 부대찌개의 강렬한 냄새들이 뒤엉킨다. 냄새 하나에 가게 하나, 그렇게 쌓여 골목이 되고 도시가 된다. 내게 음식의 냄새는 이 도시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서울 서촌의 한 족발집이 있었다. 흰 벽지가 희끄무레해지는 시간 5년, 그 시간 내내 족발 삶는 들통에 불이 꺼지지 않았다. 문을 열어둬도 간장과 돼지기름이 뒤엉켜 펄펄 끓는 냄새는 빠지질 않는다. 그 냄새로 손님을 꼬드겼다. 족발집 열기 전에 포장마차를 했고, 어렵게 모은 돈으로 리모델링해 가게를 냈다. 월세 한번 안 밀리고 성실하게 살았다. 임대차보호기간이 끝나는 5년, 이제야 단골장사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러다 동네가 떠버렸고, 투기꾼들이 몰려들었다. 건물주가 바뀌었고, 월세 네배를 부른다. 이렇게 나갈 수 없다고 하니 강제집행이었다. 그 사정에 많은 시민이 공감하며 함께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을 외쳤고, 기어이 법을 바꾸었지만 가게가 처한 현실과 감당해야 할 몫은 그대로였다. 법을 바꾼 가게 ‘궁중족발’은 그렇게 쫓겨났고, 많은 빚을 져가며 힘겹게 일군 골목을 떠나야 했다.

궁중족발은 그렇게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었다. 강제집행 당하며 가장 먼저 빼놨던 씨육수를 얼려놨다가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희끄무레한 벽지는 없지만, 냄새만큼은 여전했다. 멈춰있던 시간은 다시 끓으며 명료해지고, 강제집행의 기억은 어슴푸레하다. 가게를 지키느라, 법을 바꾸느라 멈춰있었던 일상이 강렬한 냄새와 함께 돌아왔다. 궁중족발이 당한 마지막 강제집행으로부터 5년이 지났다. 라이더 일을 하는 친구가 서촌 골목 지나다 가게 있던 자리의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창문이 깨져있고, 간판이 뜯긴 채로 여전히 공실이다. 대체 무슨 사정이 그리도 급해 그렇게 쫓아내야만 했을까. 간판 뜯긴 자리에는 궁중족발 사장 부부가 예전에 운영하던 포장마차 이름이 자국 져 있다. ‘주거니 받거니’

재개업한 궁중족발(현 주거니 받거니)의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윤경자 사장. 박김형준 작가 제공
재개업한 궁중족발(현 주거니 받거니)의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윤경자 사장. 박김형준 작가 제공

홍은동에 새 둥지를 튼 궁중족발은 얼마 전 가게 상호를 ‘주거니 받거니’로 바꿨다. 오랜 포장마차 경력에 워낙 솜씨 좋으시니 잘됐다 싶었다. 차림표 맨 위에는 여전히 족발이 자리 잡고 있다. 간장 끓는 들통은 여전하지만, 새로운 메뉴가 더해지니 냄새는 바뀌었다. 이제 나는 이 가게에서 바뀐 이름만큼이나 완전히 새로운 기억을 쌓게 되겠구나, 냄새로 그렇게 짐작한다. 법을 바꿔 많은 사람의 삶을 지켜낸 가게다. 족발에 안주까지 한상 푸짐하게 시켜 먹으며 기도했다. 주기만 했으니 받기도 하는 가게로 부디 오래오래 지켜달라고.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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