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경의 이방인, 초라함의 상대성]
6 _정체성은 명사가 아니다
여울은 퀴어라는 정체성을 자신이 사는 삶의 방식을 형용하는 표현이라고 했다.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에 가깝다고. 여울이 만들어 가는 관계가 퀴어의 삶을 그려내는 설명이니 진행형이고 영향받고 영향을 미치는 그 무한한 범위를 담아낼 수밖에.
오래된 악기점답게 벽면 가득 악보가 있었다. 딸과 나의 눈은 길을 잃었다. 그때 에밀리가 다가왔다. 허리춤까지 흐르는 금발 사이로 가뭇한 코밑이 보였다. 나는 트렌스젠더란 것을 알아챈 눈치를 감추고자 내 딸 이름도 에밀리라고 소개하며 ‘천공의 성 라퓨타’ 주제곡을 찾는다고 답했다. 금발의 에밀리는 딸을 보며 멜로디를 불렀다. 아뿔싸! 메조소프라노였던 목소리가 바리톤으로 낙하했다. 딸은 맞다고 했고, 금발의 에밀리는 지금 없다며 구해서 연락하겠다고 했다. 가게를 나오며 딸이 내게 한국어로 말했다. “노래할 때 언니 목소리가 이상해.” 나는 ‘음역이 낮아서 그래’라고 지나쳤다. 6년 전 일이다.
두달 전, 여울과 인터뷰하기로 한 날이었다. 생각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졌다. 엉겁결에라도 여울을 불편하게 해선 안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이런 나를 부담스러워 할 것도 같았다. 여울의 엄마는 나의 친구다. 사진 속 야생화 같던 여울의 학창시절을 기억한다. 여울이 남성의 몸으로 전환했던 2020년 가을에는 그 큰 수술에 내 마음도 졸였다. 여울에 대한 상념을 제치고 6년 전 악기점에서의 일이 선명히 다가왔다. 10살 딸은 금발의 에밀리에게 ‘언니’라고 호응했는데 나는 아직껏 ‘이상해'만 기억하고 있다니. 진의를 알아듣지 못했다.
오후 3시, 3시간의 시차 너머 뉴욕에서 모니터로 등장한 여울은 그대로였다. 풀꽃 같던 싱그러움은 29살 청년으로 자라 바위산에 뿌리 내린 소나무처럼 단단했다.
여울: 최근 3년 동안 저를 좀 더 믿고,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확고해지는 과정 속에 있던 것 같아요. 10년을 몰아치듯 일했는데, 지금은 생활할 정도로만 하고 가치 있는 활동으로 채워가요.
여울은 미국을 차별 위에 지어진 사회라고 치부했기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차별에 대한 이해도 낮았다고 한다. 그러다 5년 전에 갔던 컨퍼런스에서 궤도를 틀었다. 한국계 퀴어 트랜스젠더 모임에서 연 행사였다. 여울이 이중의 소수자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한 날이다.
여울: 중성적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고, 뉴욕 한복판에 있는 미술학교에 다니다 보니 퀴어라는 정체성이 평범했어요. 가족과 매일 전화하는 애착유형이 아니기에 숨기진 않았어도 굳이 말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죠. 성 정체성도 그중 하나였어요.
내 미국인 퀴어 친구들은 대여섯 살 때부터 성정체성을 인지했다고 했다. 나는 이들의 세상에는 그 개념이 존재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살던 한국 사회는 공적으로 인식하려 하지 않았다.
여울: 어휘가 존재하지 않아서도 부모님과 소통하기 어려웠어요. 젠더 이론도 배우며 영어 어휘는 늘었는데 이를 한국어로 통역할 수 없었으니까요. ‘나를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분들이니 설명하지 않아도 벌써 아셨겠지’ 생각했죠.
나: 놀라시는 것에 놀랐나요?
여울: 많이 놀라고 약간 어이가 없었어요.
여울의 부모는 한국 사회에서 진보에 속하는 80년대 학번이다. 여울은 한국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경쟁관계 뿐 아니라 틈 없이 짜인 규칙들까지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교복도 싫었다며 덧붙였다. ‘불편한 옷이죠.’ 그제야 청소년들이 정장을 입고 공부하는 현실이 보였다. 젠더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도. 여울은 치마를 입어야만 했구나.
나: 힘든 적 있어요?
여울: 매일 힘들죠. 저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은 사람이더라고요. 어제도 산책하다가 ‘실존적인 위기가 있을 것 같아’ 이런 기분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위기상황은 아니에요. 보통이에요. 대부분의 날에 약간 슬픈 구석이 있고, 존재에 대한 질문이 있어요.
나는 3년 전까지 발목을 잡던 불안장애에 관해 말했다. 내가 했던 알량한 방법이라도 전해 여울의 하루를 일으키고 싶었다. ‘동물은 다쳤을 때 안전한 곳을 찾아가 잔대, 나도 불면이 두려웠지만 용기 내서 잠자리에 들어갔어. 매일 강가를 걸었지. 목구멍을 조이던 호흡이 가슴께로 내려갔어. 뱃속에 청승주머니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우울이 삶의 질문들로 끌고 가니 쓸모 있다 여겼고. 급할 때는 방석 놓고 앉았지. 숨에 집중하고 생각을 지우다 보면 뭔가 불쑥 올라오는 찰나가 있더라고. 눈물도 터지고. 그 눈물이 숨을 틔워.’
여울: 눈물을 흘렸을 때 뭔가 풀리는 게 있죠. 사실은 눈물 흘리기 직전에 일어나는 것 같아요.
맞다. 출구를 찾은 불안한 사고가 해소의 증거로 눈물을 남긴다. 여울도 다 해봤구나.
여울에게 정체성의 실체에 관해 물었다. 나는 정체성을 분류하는 기준은 무한히 증식될 수 있기에 세상에는 80억 고유한 개인만이 있다고 나의 결론부터 말했다. 여울은 그럼에도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은 있다고 맞받았다. 나는 인간이 갈구하는 소속감(belonging)과 정체성(identity)의 차이를 구분해 보자고 제안했다.
여울: 사실 정체성은 협소한 개념이죠. 좀 더 인공적이고. 소속감은 내가 어떠한 전체의 한 부분이라는 느낌이잖아요. 예를 들어서 퀴어도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이거고, 너는 저거야 이렇게 되는데 솔직히 그런 이유로 분류에는 관심이 없어요. 어렸을 때 퀴어라는 단어를 알았음에도 스스로 지칭하지 않았던 기간이 있어요. ‘나는 너랑 달라’라고 구분 짓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무언가의 한 부분이 되고 싶어서 ‘나는 이런 친구들과 마음이 맞아. 우리는 같은 경험을 공유해. 우리는 공동체야’ 그렇게 이해하며 ‘아, 나는 퀴어고, 이민자고 어쩌고 저쩌고다’를 받아들이게 됐죠.
여울은 퀴어라는 정체성을 자신이 사는 삶의 방식을 형용하는 표현이라고 했다.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에 가깝다고. 여울이 만들어 가는 관계가 퀴어의 삶을 그려내는 설명이니 진행형이고 영향받고 영향을 미치는 그 무한한 범위를 담아낼 수밖에.
나: 퀴어로서의 삶에서 ‘삶은 뭐다’라고 동사를 하나 뽑는다면요?
여울: 릴레이트(relate·관계 맺다) 같아요. 나 자신이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관한 거죠. 미국 선주민들은 관계(relation)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현대 사회에서는 ‘나는 누구다. 나는 무엇이다’ 이런 관점으로 이해하는데, 오래된 생각에서는 ‘나는 누구고 나의 친척들은 누구며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연결돼 있고 이 연결고리들을 통틀어 볼 때 중심에 있는 존재가 나다’라고요. 그때, 중심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는 이런 연결들의 합이라는 것이 중요하죠.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이 연결의 합으로서 젠더란 무얼까요?’
여울: 사람들은 ‘젠더란 정해져 있는 카테고리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유연한 개념이잖아요. 여성 남성 정확하게 주어져 있지 않고,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어떤 문화, 어떤 시대냐에 따라 규정짓는 의미가 다른데요. 이런 흐물흐물한 개념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닿는 젠더가 무엇일까를 살피며 대강 논바이너리(엄격하게 여/남으로 구분되지 않는), 트랜스페미닌(지정 성별은 남성이나 여성성이 더 크다고 인식하는) 등을 정하지만 이 정의도 다 지어낸 거죠.
나: 젠더도 명사가 아니로군요. 인식의 흐름 속에서 유동하는 분류!
여울을 만나는 날 아침 나는 공책에 ‘정체성은 흐른다. 명사가 아니다’ 라고 썼다. 그날 오후, 아침에 쓴 문장의 앞뒤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여울에게서 들었을 때 신비로웠다. 서로 미처 모르던 마음인데 별처럼 있었다. 점과 점으로 연결되어. 세상 모두도 그렇게 각기 서 있는 곳에서 점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2002년 미국으로 이주,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인류 생존을 위한 10년 전략을 제시하는 대담집 ‘내일의 세계’, 세계 지성들과 코로나19의 원인과 미래를 탐색하는 ‘오늘부터의 세계’, 리베카 솔닛 등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대담 ‘어크로스 페미니즘’, 문명의 현재와 이를 만들어온 개인의 마음 운용 실체까지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세계 지성 29인과의 대담 3부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문명, 그 길을 묻다’, ‘사피엔스의 마음’, 현대미술 작가들과의 대담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이해인의 말’, ‘최재천의 공부’, 에세이 ‘나의 질문’을 펴냈다.
여울은 추석을 쇠러 한국계 퀴어 친구들과 미국 뉴욕 북쪽에 있는 산골에 갔다. 맨해튼으로 오기 전, 왼손에 자연의 기운을 담으며 오른손으로 지나온 시간을 흘려보내는 침묵 의식을 가졌다. 여울이 흐른다. 사진 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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