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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무료할 수 없는 성소수자의 노년

등록 2023-10-04 18:55수정 2023-10-05 02:35

지난 9월9일 네팔, 대만, 일본, 태국, 한국 등 아시아 5개국 활동가들이 모여서 ‘성소수자의 노후 준비 어떻게 하고 있나?’라는 주제로 컨퍼런스를 열고 있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제공
지난 9월9일 네팔, 대만, 일본, 태국, 한국 등 아시아 5개국 활동가들이 모여서 ‘성소수자의 노후 준비 어떻게 하고 있나?’라는 주제로 컨퍼런스를 열고 있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제공

[비온 뒤 무지개] 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흔히 빈곤, 질병, 고독, 무위를 노인의 4대 고통이라고 한다. 2020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사회보장 대국민 인식조사’를 실시했다. 노후 생활에서 가장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 항목에 1위는 경제적 어려움(32.9%), 2위는 건강 및 기능 약화(30.6%), 3위와 4위는 소외 및 고독감(13.4%), 무료함(10.0%)이 차지했다. 예상대로 나온 셈이다. 만약 같은 질문을 성소수자 국민에게 한다면 어떨까.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가 지난 9월에 발간한 ‘제2차 성소수자 노후인식조사 보고서’를 보면 흥미로운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성소수자의 답변도 1위부터 3위까지는 대국민 조사와 같았다. 하지만 4위는 달랐다. 대국민 조사와 달리 무료함은 1%에 불과했다. 어찌하여 이렇게나 차이가 날까. 성소수자들은 나이 들어서도 즐겁게 매일 살 수 있기 때문에? 노후 준비 정도를 점검하는 항목에서 성소수자가 일반 국민보다 대인관계와 여가에 더 준비를 잘하는 것으로 나오긴 했지만 그리 쉽게 분석할 수는 없다. 성소수자가 꼽은 4위는 ‘나를 돌봐줄 사람’에 관한 걱정이었다. 대국민 조사에서 2%로 7위였지만 성소수자 조사에서는 9.2%가 택했다. 즉, 성소수자 노인의 4대 고통은 빈곤, 질병, 고독 그리고 돌봄의 공백인 셈이다.

여기엔 법적 인정을 받을 수 없기에 파트너가 아플 때 보호자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 대외적으로 미혼 자녀로서 부모 돌봄을 더 책임져야 하는 무게, 편견과 차별없이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평등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불안까지 모두 섞여 있다. 성소수자라서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에 비해 노후가 더 불안할 것이라고 무려 73.3%가 답했고, 31.8%는 ‘인권향상이 되지 않아 나이 들었을 때도 성소수자라서 무시하고 차별하는 사회일까봐’ 두렵다고 답했다.

‘제2차 성소수자 노후인식조사’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또 있다. 성소수자의 노후를 돕기 위한 서비스를 제공받는다면 무엇이 가장 시급하냐는 질문에 재무 설계나 법률 상담을 제치고 ‘나이 든 성소수자의 삶을 나누고 배울 수 있는 모임’(31.9%)이 1위를 차지했다. 같은 질문을 일반 국민에게 했다면 어땠을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노인의 삶을 나누고 배우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이렇게까지 높게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이듦을 두려워하는 건 노년의 삶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니까. 부모와 조부모, 이웃과 방송에 나오는 노인까지 주위에 자신의 노년을 비추어 볼 롤모델이 많지만, 성소수자가 일상에서 나이 든 성소수자를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미디어를 통해서 간접 경험할 기회조차 흔치 않다. 나도 나이 들면 저렇게 되고 싶다는 선망이나 하다못해 저렇게는 늙지 말자 같은 경계와 한탄조차 쉽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 들고 늙는다는 점에서는 평등하지만 나이듦을 상상할 수 있는 조건은 저절로 평등해지지 않는다. 지난 9월9일 대만, 태국, 네팔, 일본, 한국 등 아시아 5개국 성소수자 컨퍼런스가 열렸었다. 2025년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을 앞두고 있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호들갑과 달리 성소수자 노인에 대한 정부 차원의 논의와 고민이 전혀 없는 곳은 한국이 유일했다. 무료함을 걱정할 수조차 없는 것이 지금 성소수자 국민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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