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0년간 기업이나 국가기관이 노동자 개인을 상대로 제기한 381개 소송의 총 배상규모는 3160억원에 달한다. 국회는 ‘노란봉투법’이라 불리는 노조법 2·3조 개정안부터 시급히 처리해야 한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그리고 정부가 ‘엠제트(MZ)노조’라 부르는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까지 한목소리를 내는 노동계 최대 현안이다.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각계 시민 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노조법 2·3조 9월 국회 본회의 처리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여섯명 학생들이 두개의 농구공을 가지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패스를 한다. 세명은 흰색, 다른 세명은 검은색 티셔츠를 입었다. 이들이 공을 주고받는 장면을 1분 미만의 동영상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흰색 팀의 패스 횟수를 세어보라고 한다. 사람들은 신경을 곤두세워 공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동영상이 끝나자마자 자신 있게 패스 횟수를 외친다. 그러나 여기서 어느 팀이 패스를 몇번 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패스 횟수를 세는 데 열중했던 사람들에게 묻는다. “고릴라를 보셨나요?”
1999년 크리스토퍼 셔브리와 대니얼 사이먼스가 하버드대 심리학과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한 이 실험은 인간의 직관과 인식이 얼마나 허술하고 부정확한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학생들이 공을 주고받는 사이, 고릴라 의상을 입은 이가 그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와 카메라 앞에 멈춰 서서 가슴을 치고 다시 걸어나간다. 무려 9초 동안 화면에 등장하는데, 이 실험에 응한 사람의 절반 정도는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특정한 부분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사물이나 사건이 나타나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뇌과학에서는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이런 현상을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고 한다. 이 실험에서 더 놀라운 것은 영상에 고릴라가 지나갔다는 걸 알게 된 뒤 사람들 반응이다. 자신이 눈 벌겋게 뜨고도 고릴라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일부는 “원래 비디오에는 저 고릴라가 없었다”고 우기기도 한다. 실험 결과는 지능과 교육 수준, 성별에 따라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회가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9일째 단식하다 병원에 실려 간 날 검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수사받던 피의자가 단식해서, 자해한다고 해서 사법 시스템이 정지되는 선례가 만들어지면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민주당은 지난 16일 ‘전면적 국정 쇄신과 내각 총사퇴, 한덕수 총리 해임건의안 제출’을 결의한 상태이다. 대통령실은 ‘막장 투쟁’이라며 대화 가능성을 일축한다. 평행선이다.
추석은 다가오는데, 국회에 계류 중인 민생법안과 시급한 개혁입법은 연내 처리가 불투명하다. 힘없는 고릴라들이 아무리 가슴을 두들기며 호소해도 국회내 공 싸움에선 투명한 존재가 된다. 공이 어디로 몇번 튀는지에만 집중하는 언론 보도는 고릴라의 존재를 잊도록 한다. 정치권의 막말과 고성, 말싸움이 미디어를 도배한다. 이런 가운데, 지난 15일 한국방송(KBS) ‘추적 60분’의 ‘3160억을 배상하라, 인생을 압류당한 사람들’ 편은 공영방송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귀한 보도였다.
2010년 대법원은 현대자동차의 사내하청 불법파견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지만, 현대자동차는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노동자 323명에게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한 노동자는 손해배상금 220억원을 물어내라는 판결을 받았고 판결 이후 지금까지 이자만 10억원이 불었다. ‘갚으려면 300년이 걸리는’ 액수, 하루하루 뼈 빠지게 일하는 노동자들로서는 구경한 적도 없는 돈이다.
최근 30년간 기업이나 국가기관이 노동자 개인을 상대로 제기한 381개 소송의 총 배상 규모는 3160억원에 달한다. 국회는 ‘노란봉투법’이라 불리는 노조법 2·3조 개정안부터 시급히 처리해야 한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그리고 정부가 ‘엠제트(MZ)노조’라 부르는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까지 한목소리를 내는 노동계 최대 현안이다.
공영방송 이사와 사장을 해임하고 공영방송을 대자본에 넘기려는 언론장악 공세에도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국민동의청원을 거쳐서 국회 본회의에 부의되어 있는 방송3법 개정안은 법적 규정도 없이 여당 추천으로 공영방송 이사의 3분의 2를 채우게 되어 있는 현행 관습을 철폐하고 정치권의 입김을 최소화해서 권력으로부터 방송 독립을 도모하는 법안이다.
노조법 개정안이 잊힌 고릴라들에게 무대에 등장할 수 있도록 존재의 권리를 부여하는 법안이라면, 방송법 개정안은 권력과 자본의 강압으로 고릴라들을 영상에서 지우는 일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더불어민주당은 좌고우면하지 말고 국회 다수당의 권력이 누구를 위해 쓰여야 하는지를 실천으로 보여야 한다. 대통령 거부권은 나중 문제다. 그건 국민이 판단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