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세상읽기] 한승훈 | 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전공 교수
지난 8일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고인과는 세대가 멀고 소속이 달라 직접 수학하거나 교류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필자에게는 한창 종교학도로서의 꿈을 키우던 대학 시절 종교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스승 가운데 한분이다. 서울대에서 철학을, 예일대에서 신학을, 하버드대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고인은 ‘인도 철학사’ ‘일본의 정토 사상’ ‘지눌의 선 사상’ ‘보살예수’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종교에서 영성으로’ 등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교직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강화도에 심도학사를 세우고 고전 공부와 명상 교육을 이어나갔다.
그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종교 간의 회통을 추구하는 “종교다원주의”로 알려져 있으나, 스스로는 “영적 휴머니즘”이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그의 마지막 저서의 제목이기도 한 영적 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이기 때문에 종교적 편견과 독단에 반대하지만, ‘영적’이기 때문에 모든 초월적인 것을 비판하고 배척하는 세속주의와도 대립한다. 영적 휴머니즘은 모든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가치를 ‘세속적’ 휴머니즘과 공유하면서도, 근대적 이성과 오늘날의 세계가 맞닥뜨린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대안이 되리라는 것이 길희성의 주장이다.
이런 관점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와 ‘영성’을 구분해볼 필요가 있다. 제도화된 종교는 교리, 의례, 관행, 규율 등이 오랜 역사를 통해 켜켜이 누적된 복잡한 문화적 구성물이다. 그것은 권위를 부여받은 질서로 단단하게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는 위계가 설정되고, 정치권력과는 쉽게 결탁하고, 차별적이고 불합리한 낡은 체제를 지지하는 경우도 많다. 세속적 휴머니즘은 그런 종교의 굴레로부터 인간과 사회를 상당 부분 해방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화’된 지구다.
한편 길희성은 영성을 “인간에 내재하는 신의 본성이자 인간의 본성”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인 능력이다. 그리고 종교 전통들은 그런 영성에 기반을 둔 영적 휴머니즘을 성령, 불성, 여래장, 범아일여 등 다양한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전승해왔다. 그것은 개체적 자아를 넘어서는 인간의 가능성, 타자를 자신의 몸처럼 진실하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잠재력이다.
종교가 많은 부분 지나간 시대의 낡은 제도가 되어버린 오늘날에도 여전히 열성적인 신자들과 가치 있는 지혜들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영성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문화적 전통이기 때문이다. 전투적인 세속주의자들은 종교를 무지와 환상으로 가득한 과거의 유물로 취급하며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길희성은 종교 전통에 보전된 영적인 인간관은 여전히 의미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이라고 본다.
이쯤 되면 영적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현실의 종교들을 권장하고 있는 것인지 비판하고 있는 것인지 슬슬 혼란스럽다. 영성이 종교의 가장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알맹이라면, 그 겉껍질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제도나 율법들은 중요하지 않거나 심지어 인간의 영적 본성을 억압하는 것이다. 실제로 길희성은 예언자,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종교 내부에서의 종교 비판을 높이 평가한다. 예언자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악행을 신성한 의지로 고발한다. 신비주의자들은 경전의 참뜻 대신 문자적 의미에 집착하며 ‘정통 교리’를 수호하려는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바로 이런 지점 때문에 영적 ‘휴머니즘’이 중요해진다. 인간을 소외시키고 억누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종교든 뭐든 타파의 대상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영적’인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에, 해방과 각성을 위한 무기는 역설적이게도 종교 속에서 가장 풍부하게 발견된다. 길희성은 이성과 상식을 무시하는 ‘묻지마’식 신앙생활에 열정을 쏟기보다는 차라리 종교 없이 살라고 권한다. 그는 영적 휴머니즘이라는 결코 포기하기 어려운 인류의 귀중한 유산을 “땅속에 깊이 묻힌” 또는 “깊은 늪에 빠져버린” 상태라 묘사한다. 땅속이니 깊은 늪이니 하는 것은 바로 고리타분한 구닥다리처럼 보이는 종교 전통들을 가리킨다. 연구자로서는 그 땅이나 늪 자체를 분석하는 편이 흥미롭지만, 인간으로서는 영성이라는 보물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