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경계 없이 종교 연구한 길희성 박사를 기리며
기독교 영적 뿌리에 불교학자 명성
평신도 공동체 새길교회 만들고
공부·명상의 집 ‘심도학사’에 헌신
말년에 지독한 병고 시달리면서도
지적·영적 주제와 씨름하며 탐구 “선생님은 초종교적 영성을 추구하시면서 왜 그리스도교를 떠나지 않으세요?” “예수님이 너무 좋아.” 어느 햇살 따사로운 오후의 대화였다. 길희성(사진) 선생님은 경계 없이 종교를 연구하고 불교학자로서 명성을 떨치셨지만, 당신의 영적 뿌리는 언제나 그리스도교였다. 종교학자로서 이웃 종교를 탐구하시면서 당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 깊고 풍요롭게 하셨다고 해도 좋겠고, 그리스도교 영성의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 이웃 종교와 벽 없이 소통하셨다고 해도 좋겠다. 존 캅은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길들’에게 열린 ‘길’”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예수의 길에서 다른 길들인 붓다를 만나시고, 임제 선사를 만나시고, 해월신사를 열린 마음으로 만나셨다. 그렇게 평생을 길 위의 구도자로 사셨다. 선생님은 석학이라는 말이 과하지 않은 비범한 학자셨지만, 강단과 서재에만 안주하지 않으셨다. 앎은 행함으로, 믿음은 따름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으셨기에, 연구에 매진하면서도 평신도 공동체 새길교회 창립에 참여하셨고, 강화도에 공부와 명상의 집 심도학사를 만들고 헌신하셨다. 선생님의 ‘보살예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사상’, ‘종교10강’, ‘영적 휴머니즘’ 등은 새길교회와 심도학사에서 도반들과 나누셨던 생생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 책들이다. 말년의 선생님은 지독한 병고에 시달리셨다. 여러 해 전부터 병세가 나타났고, 마지막 저작이며 역작인 ‘영적 휴머니즘’을 쓰시고서는 기력과 지력이 더욱 급격히 쇠하셨다. 몸이 마음을 못 따르게 되면서 더 탐구하고 싶으셨던 지적, 영적 주제들과 씨름하지 못하시게 된 것을 괴로워하셨다. 학자로서 하실 만큼 하셨으니, 아니 하실 수 있는 이상으로 하셨으니, 이제 그만 편히 내려놓으시라고 말씀드리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러겠다 하시면서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불교의 무아론과 비아론, 양자역학, 동학사상, 생명철학 같은 연구 과제들을 열정적으로 말씀하셨다. 간디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라”고 했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살고 배우셨다. “여기, 광주야.” “광주요? 거기서 뭐 하세요?” “도청 자리도 가 보고, 금남로도 걸었어.” 선생님은 학자로서, 신앙인으로서 살아오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셨고, 사회에 대한 관심도 늘 놓치지 않으셨지만, 시민으로서 역사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셨던 것을 무척 부끄러워하셨다. 그래서 뒤늦게 리영희 선생님의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를 구해 읽으셨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광주까지 가셔서 1980년 5월의 민주 영령들을 기리셨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당신을 ‘역사의 지각생’이라고 부르셨다. 선생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으셨지만 피하고 싶어하셨다. 살고 싶어하셨다. 더 공부하고, 더 생각하고, 더 쓰고 싶으신 게 남아 있어서였다. 그러다 생사의 고비를 서너 차례 넘기신 다음에, 웃으시며 농담처럼 가볍게 말씀하셨다. “내가 평생 죽음을 탐구하고 가르치며 살았는데, 창피하게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로소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다. 심도학사 연구원인 이진권 목사님이 병상에 누워 계신 선생님의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느님,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길희성 선생님을 지금껏 지켜주시고 동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을 때, 갑자기 두 팔을 들어 허공을 몇 번 가리키시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그중에 한 마디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사랑하셨던 에크하르트는 “우리 평생의 기도가 ‘감사합니다’ 오직 하나라면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그 말을 마지막 기도처럼 남기고 지난 8일 신비의 세계로 돌아가셨다. 정경일 심도학사 연구원·성공회대 연구교수, 사진 조현 기자 cho@hani.co.kr
평신도 공동체 새길교회 만들고
공부·명상의 집 ‘심도학사’에 헌신
말년에 지독한 병고 시달리면서도
지적·영적 주제와 씨름하며 탐구 “선생님은 초종교적 영성을 추구하시면서 왜 그리스도교를 떠나지 않으세요?” “예수님이 너무 좋아.” 어느 햇살 따사로운 오후의 대화였다. 길희성(사진) 선생님은 경계 없이 종교를 연구하고 불교학자로서 명성을 떨치셨지만, 당신의 영적 뿌리는 언제나 그리스도교였다. 종교학자로서 이웃 종교를 탐구하시면서 당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 깊고 풍요롭게 하셨다고 해도 좋겠고, 그리스도교 영성의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 이웃 종교와 벽 없이 소통하셨다고 해도 좋겠다. 존 캅은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길들’에게 열린 ‘길’”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예수의 길에서 다른 길들인 붓다를 만나시고, 임제 선사를 만나시고, 해월신사를 열린 마음으로 만나셨다. 그렇게 평생을 길 위의 구도자로 사셨다. 선생님은 석학이라는 말이 과하지 않은 비범한 학자셨지만, 강단과 서재에만 안주하지 않으셨다. 앎은 행함으로, 믿음은 따름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으셨기에, 연구에 매진하면서도 평신도 공동체 새길교회 창립에 참여하셨고, 강화도에 공부와 명상의 집 심도학사를 만들고 헌신하셨다. 선생님의 ‘보살예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사상’, ‘종교10강’, ‘영적 휴머니즘’ 등은 새길교회와 심도학사에서 도반들과 나누셨던 생생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 책들이다. 말년의 선생님은 지독한 병고에 시달리셨다. 여러 해 전부터 병세가 나타났고, 마지막 저작이며 역작인 ‘영적 휴머니즘’을 쓰시고서는 기력과 지력이 더욱 급격히 쇠하셨다. 몸이 마음을 못 따르게 되면서 더 탐구하고 싶으셨던 지적, 영적 주제들과 씨름하지 못하시게 된 것을 괴로워하셨다. 학자로서 하실 만큼 하셨으니, 아니 하실 수 있는 이상으로 하셨으니, 이제 그만 편히 내려놓으시라고 말씀드리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러겠다 하시면서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불교의 무아론과 비아론, 양자역학, 동학사상, 생명철학 같은 연구 과제들을 열정적으로 말씀하셨다. 간디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라”고 했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살고 배우셨다. “여기, 광주야.” “광주요? 거기서 뭐 하세요?” “도청 자리도 가 보고, 금남로도 걸었어.” 선생님은 학자로서, 신앙인으로서 살아오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셨고, 사회에 대한 관심도 늘 놓치지 않으셨지만, 시민으로서 역사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셨던 것을 무척 부끄러워하셨다. 그래서 뒤늦게 리영희 선생님의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를 구해 읽으셨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광주까지 가셔서 1980년 5월의 민주 영령들을 기리셨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당신을 ‘역사의 지각생’이라고 부르셨다. 선생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으셨지만 피하고 싶어하셨다. 살고 싶어하셨다. 더 공부하고, 더 생각하고, 더 쓰고 싶으신 게 남아 있어서였다. 그러다 생사의 고비를 서너 차례 넘기신 다음에, 웃으시며 농담처럼 가볍게 말씀하셨다. “내가 평생 죽음을 탐구하고 가르치며 살았는데, 창피하게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로소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다. 심도학사 연구원인 이진권 목사님이 병상에 누워 계신 선생님의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느님,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길희성 선생님을 지금껏 지켜주시고 동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을 때, 갑자기 두 팔을 들어 허공을 몇 번 가리키시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그중에 한 마디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사랑하셨던 에크하르트는 “우리 평생의 기도가 ‘감사합니다’ 오직 하나라면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그 말을 마지막 기도처럼 남기고 지난 8일 신비의 세계로 돌아가셨다. 정경일 심도학사 연구원·성공회대 연구교수, 사진 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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