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전중윤 (1919~2014)
1950년대에 보험회사를 경영하던 금융인이었다. 일본을 오가며 사업 거리를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1958년에 일본에 인스턴트 라면이 등장했다. 전중윤은 1961년에 식품 사업을 시작했다. ‘먹다 남은 음식을 끓인 꿀꿀이죽을 남산 아래 줄 서서 사먹는 굶주린 사람들이 안타까웠다’고 회상했다.
미국의 원조를 받던 시절이었다. 한국에 밀가루는 많고 쌀은 부족했다. 전중윤은 군부 실세 김종필을 찾아가 일본에서 나온 라면을 끓여 먹였다. ‘한국에 라면 공장을 세우려고 하니 달러를 내어달라’고 설득을 했다. 일본에 건너가 묘조식품 라면 공장의 견습생이 되어 일을 배웠다. 그를 좋게 본 묘조식품 회장이 수프 배합 비법을 자기네 회사 사람들 몰래 적어줬다고 한다.
육십년 전 오늘, 1963년 9월15일에 삼양라면이 출시됐다. 그때만 해도 낯선 음식이라 한동안 잘 안 팔렸단다.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맛을 보고는 “고춧가루를 넣으라” 권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야기마다 세세한 부분이 달라 사실 같지는 않다.
삼양식품(삼양라면)은 오랫동안 라면 업계 1위를 지켰다. 권력자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1970년대 권력 암투로 김종필이 밀려난 뒤 전중윤이 이후락에게 불려 다니며 곤욕을 치른 뒷이야기가 있다. 그가 세운 문화재단이 박정희가 죽은 뒤 박근혜 손에 넘어간 사연도 알려지지 않았다. 1989년의 이른바 ‘우지파동’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우지파동 때문에 삼양라면이 업계 1위 자리를 빼앗겼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 안성탕면과 신라면을 내놓으며 농심 라면이 치고 올라왔다. 우지파동이 터진 것은 삼양식품이 업계 1위 자리를 빼앗긴 다음이다. 그렇다 해도 억울한 일이었다. 라면에 우지(소기름)를 넣었다며 여론의 뭇매를 맞고 수사까지 받았다. “우리가 쓰던 우지는 경쟁사가 쓰던 팜유보다 훨씬 비싼 재료였다.” 전중윤의 회고다.
삼양은 2012년에 불닭볶음면을 내놓으며 다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전중윤은 2010년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2014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