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 활동가와 회원, 시민들이 지난달 24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공원에서 ‘공원 여성 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 국가 규탄 긴급행동’에 나서 공원 산책로를 따라 사건 현장까지 걷고 있다. 김정효 기자
[세상읽기]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주택가에 낮고 빠른 전투기 소리가 울렸다. 짧은 사이에 사무실 곳곳에서 동료들이 나왔다. 무슨 일이야? 불안한 질문은 에스엔에스(SNS)에도 많았다. 검색하니 ‘10월 국군의 날 서울상공 예행연습’이란다. 상황은 알게 됐지만 몸이 계속 서늘하다. 군대는 전쟁 ‘억지’력을 위해 존재한다는데, 기념일에는 최고의 전투력과 무기를 뽐낸다. 훌륭한 전투기와 병력이 있으니 걱정 말라는 것 같지만, 전투비행단 예행연습 소리에 고조된 건 안심이 아니라 불안이다.
최근 반복되는 살인, 상해 사건에 ‘장갑차’와 ‘무장특공대’가 나타났다. 현 상황을 테러로 간주한다며 공권력이 내놓은 대응이다. 무엇이 테러인가? 장소를 특정하고 해당 공간에서 다수의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 그러나 최근 일어난 사건들은 예고하기도, 하지 않기도 했고, 특정인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여러 명에게 하기도 했다. 오히려 드러나는 점이 있다면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는 서사구조,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분출하는 혐오범죄의 성격, 흉기까지 동원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장벽 없는 실행 같은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일은 여성폭력에서 숱하다. 한국여성의전화 분석을 보면 2022년 한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최소 86명,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225명이었다.
여성 위협, 상해, 살인이 매년 수도 없이 일어난다. 그런데 여성들이 장갑차, 무장특공대, 대테러진압을 요구했던 적이 있었나? 그렇지 않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첫째 폭력 행위자를 더 큰 무기와 물리적 힘으로 제압하는 것보다 그 행위가 왜 문제인지 온 사회가 한목소리로 명확히 말하는 게 더 필요해서다. 어쩌다 제압은 하는데 왜 문제인지 정확히 말하지 못하는 공권력은
위하력(형벌로 위협해 일반인을 범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힘)이 될 수 없다. 둘째 폭력 행위자를 제압하겠다며 더 큰 힘을 행사하는 이가 또 다른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것을 수도 없이 겪었기 때문이다. 성찰하지 않고 경쟁하는 힘은 힘의 지속적 확대를 목적으로 한다. 셋째 힘센 가해자와 더 힘센 제압자의 싸움이 되어 버리면 정작 피해자의 의사와 결정은 사라지고, ‘너는 빠져 있어!’ 같은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에 대한 예우와 위상은 높이지 않은 채, 제압하는 자에게 판단의 전권과 자원을 쥐여주면, 무엇이 변화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신림동 공원에서 출근길에 모르는 이에게 성폭력, 폭행을 겪은 피해자는 병원에서 중태 상태에 계시다가 이틀 뒤 사망했다. 가해자는 너클을 끼고, 폐회로티브이가 없는 곳에서, 피해자를 표적으로 삼았으며, ‘강간하고 싶었다’고 말하고,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는 서사를 시전했다. 그는 여성에게 힘을 보이고 제압하고 싶어했다. 가해자가 사용한 방식에 많은 이들은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길에서 계속 두리번거리게 돼요”, “계속 전화가 와요 괜찮냐고. 나도 괜찮냐고 묻게 되고”. 두려움이 성큼 일상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이 두려움을 품에 안고 어디로 갈 것인가? 피해생존자 ㅇ은 피해자가 사망한 날에도 한강을 걸었다. 친구와 통화하며 울었다. 피해자 생각에 계속 눈물이 났고, 매일 걷던 한강은 무섭게도 느껴졌다. 주위의 걱정대로 혼자는 이제 걷지 말아야 하나 싶었지만 결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끝까지 나는 밤 산책을 할 거야.”
피해자가 사망한 다음주 8월24일 목요일에는 그 공원에서 집회와 행진이 열렸다. 평일 오전인데도 약 300명이 모였다. 공원 입구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피해자가 생전 함께한 체육팀 회장님과 동료들이 고인을 추모했다. “언제나 먼저 고생하고, 솔선수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피해자는 아마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투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피해자에 대해 잘 모르면서 비난하는 댓글이 2차 가해입니다”. 피해자가 출근길에 걸으셨던 숲길을 줄을 이어 걷는다. 나무는 초록으로 우거지고 흙길은 여전히 포슬하다. 가해의 현장, 피해자가 끝까지 자신의 삶을 지켰던 현장에서 헌화와 묵념을 했다. 이어 신림역까지 행진했다. “혼자서든 숲길이든 괜찮은 나라 만들어라”, “국가가 권장하는 각자도생 웬말이냐”, “성평등과 존엄으로 인간답게 살고 싶다” 무장하지 않은 여성들이 피켓을 들고 외쳤다. “장갑차 말고 성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