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준 |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잇단 무차별 흉기 난동으로 온 사회가 흉흉하다. 게다가 온라인에는 모방 범죄를 예고하는 글까지 수백건씩 올라온다. 그런데 이 현상은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가 얽혀 빚어낸 결과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흐름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하필 팬데믹을 겪고 난 뒤 이런 일들이 돌출하는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2년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자가격리와 교류 단절을 겪으며 심각한 우울과 고립감에 빠져들었다. 온라인 네트워크의 급속한 발전으로 ‘초연결’ 사회가 됐다고들 하고, 실제로 팬데믹 중에 온라인 연결망은 더욱 활성화됐다.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연결에서 배제됐다고 느끼며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어나기만 한다.
어쩌면 한국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 전체의 문명사적 재검토와 이에 따른 방향 전환이 필요한 국면이 아닌가 싶다. 21세기 들어서 어느 나라든 시민사회 구조가 다양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단조로워졌다. 이것은 물론 상식과는 다른 진단이다. 시장지상주의, 소비문화, 정보통신 네트워크의 발전은 하나같이 다양성을 증대시킨다는 것이 상식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로 국가와 기업, 개인만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또 다른 중대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시민들의 자발적 결사체다. 개인들의 상호 연결을 통해 만들어지지만 개인 차원을 넘어 국가나 기업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끼치는 조직들, 가령 노동조합이나 직업협회, 종교단체나 지역주민모임 같은 조직들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권력이 강해지는 만큼 국가의 역할이 재조정된 시기이기도 했지만, 시민사회를 시민사회답게 만들던 요소인 결사체들이 쇠퇴한 시기이기도 했다. 시민의 삶에서 결사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수록 개인과 시장의 접촉면이 늘어났고 시장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해졌다. 그래서 결사체 문화의 쇠퇴는 저지하거나 역전시켜야 할 문제라기보다는 자본주의가 허용하는 ‘유일한’ 결말로 치부됐다.
다른 한편에서는 네트워크 사회의 여러 새로운 면모가 결사체 문화의 퇴장이 남긴 빈자리를 채우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게시판 ‘댓글’이 얼굴 맞댄 ‘대화’를 대체하고, 온라인 ‘커뮤니티’가 오프라인 ‘공동체’를 충분히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금세기 벽두의 이 낙관주의가 몽상에 불과했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제라도 역사의 흐름을 다시 바꾸어야 한다. 우리 앞에 놓인 숱한 위기들을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방향에서 극복해나가려면, 현재의 시민사회 구조를 어쩔 수 없는 진화의 산물로 봐서는 안 된다. 옛 결사체들이 그대로 복원될 수는 없겠지만, 새로운 형태로 결사체 문화를 부활시켜야 한다. 그래야 위기 속에서도 시민들이 면역력과 회복력을 키울 수 있다. 불평등 해결을 위해 노동조합의 회생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이런 문제의식의 일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려운 과제다. 그러나 현재의 시민사회 구조 역시 무슨 자연법칙의 결과는 아니며, 인간 집단들이 추진한 여러 기획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결사체 문화의 부활이라는 또 다른 기획 역시 미래 사회 지형을 실제로 바꿔내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이제 진보정치는 단지 주어진 시민사회 안에서 기반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결사체 문화의 부흥을 통해 시민사회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근본 과제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