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아무개 상병 사건’ 수사와 관련해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검찰단 앞에서 입장을 밝힌 뒤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춘재 | 논설위원
“국방부 법무관리관으로부터 수차례 수사 외압과 부당한 지시를 받았고 저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제가 오늘 왜 이 자리에까지 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결정을 했을 겁니다.”(2023년 8월11일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저와 후배들이 한 수사가 완전히 규정을 위반하고 법령을 어기고 국가공무원법, 검찰청법, 그런 것들을 위반했다고 하면서 (…) 앞으로 계속 진행되어야 할 수사와 재판이 이런 식으로 오도된다는 것에 대해, ‘이것은 항명이 아니다’라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2013년 10월21일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
지난 8월11일 국방부 청사 앞에 선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의 모습은 10년 전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섰던 ‘검사 윤석열’과 정확하게 오버랩된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유명해진 그 국정감사다. ‘채아무개 상병 사건’ 수사책임자인 박 대령은 대통령실과 국방부의 수사 외압 의혹을,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책임자였던 ‘검사 윤석열’은 당시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수사 외압을 폭로했다. ‘항명’에 대한 동기만 “해병대 정신”과 “조직(검찰)에 대한 사랑”으로 차이가 날 뿐, 폭로 내용은 데칼코마니를 보듯 똑같다.
박 대령은 수사 외압의 배후로 대통령 국가안보실과 신범철 국방부 차관을 지목한다. 해병대 수사단은 지난 7월30일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을 포함한 간부 8명의 과실치사 혐의가 인정된다는 내용의 수사 결과를 보고했다. 이 장관은 이 수사보고서를 결재하고 박 대령에게 ‘수고했다’고 격려까지 했다. 그런데 이튿날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이 박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적인 과실이 있는 사람으로 한정하라’, ‘수사기록에 혐의자, 혐의 내용, 죄명 다 빼라’ 등의 요구를 했다. 박 대령이 ‘굉장히 외압으로 느껴진다. 이미 장관 결재까지 끝났다’며 거부하자, 이번에는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나서서 ‘장관 귀국 시 (보고서를) 수정해 다시 보고해라. 혐의자 및 혐의 사실을 빼라. 죄명을 빼라. 해병대는 왜 말을 하면 안 듣냐’는 신 차관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압박했다. 박 대령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개정된 군사법원법에 따라 8월2일 사건을 경찰에 넘겼다. 그러자 국방부는 박 대령을 항명 사유로 보직 해임하고, 경찰에 넘긴 사건을 강제로 회수했다.
대통령실과 국방부는 박 대령에게 외압을 행사한 적이 없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검사 윤석열’은 10년 전 국회 국정감사에서 지금의 박 대령에게 가해진 일들을 가리켜 ‘수사 외압’이라고 했다. “수사팀을 힘들게 하고, 수사팀이 수사를 앞으로 자꾸 치고 나가게 해줘야 되는데, 이렇게 자꾸 뭔가를 따지고, 수사하는 사람들이 느끼기에 이것이 정당하고 합당하지 않고 좀 도가 지나쳤다고 한다면 수사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외압이라고 느낍니다.” 당시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팀이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려고 하자, 황교안 장관이 이런저런 이유로 방해한 것을 겨냥한 말이다. 그는 수사 외풍을 막아주던 검찰총장이 쫓겨난 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처럼 수사 외압에 당당히 맞선 모습은 유권자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9년 뒤 대선 승리의 밑거름이 된다. 그의 지지자들은 ‘검사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수사 외압’ 같은 말을 다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지 않았을까.
박 대령은 “사건 발생 초기 윤 대통령께서 엄정하고 철저하게 수사해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셨고, 저는 대통령의 지시를 적극 받들었다”고 했다. 국방부는 그런 그를 ‘집단항명 수괴’로 처벌하려고 한다. 박 대령이 ‘대통령의 지시’를 잘못 알아들었다고 보는 모양이다. 박 대령은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를 거부하며 윤 대통령에게 제3의 수사기관에서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받도록 해달라고 청원했다. 윤 대통령은 10년 전 자신과 꼭 닮은 그의 손을 잡아줄까, 아니면 신 차관을 비롯한 ‘수사 외압 배후’의 손을 들어줄까. ‘이태원 참사’와 ‘오송 지하차도 참사’의 수습 과정을 보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커 보이긴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비극을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하면 비슷한 사건이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반복된다는 말이다. 선택은 윤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cjlee@hani.co.kr
지난달 호우 피해 지역에서 실종자 수색 작업 도중 순직한 해병대 고 채아무개 상병의 유족이 언론에 채 상병의 이름을 보도하지 말 것을 해병대사령부를 통해 요청해왔습니다. 한겨레는 유족의 뜻을 존중하여 ‘채아무개 상병’으로 표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