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각지에서 모인 교사들이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사거리 인근에서 열린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집회에 참석해 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임재성 | 변호사·사회학자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분석 중 하나는 ‘정치의 사법화’다. 행정부와 입법부 역할이 축소되고 사법부로 권력이 이전되는 경향, 특히 국가의 주요한 정책이 사법부 판결로 결정되는 경향이 정치의 사법화다. 이해관계를 치열하게 조정해서 입법 등으로 해결돼야 할 갈등들이 수사기관과 법원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건 우리 사회의 익숙한 풍경이다.
사법의 영향력과 논리가 사회를 압도해나가면 국회나 정당과 같은 정치 영역만 쪼그라들지 않는다. 사회 다른 영역에서도 사법화가 이뤄진다. ‘사회의 사법화’다. 사법화의 핵심은 해당 영역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고유의 규범(지식)과 절차에 따라 해결되지 않고 수사와 재판이라는 사법적 절차를 통해 결판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갈등을 범죄화하는 방식이 자주 활용된다. ‘여기 범죄가 있어요’라는 외침만 있다면 공동체를 헤집고 사법이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사라진 폐허 위 법정이 우뚝 서는 과정이다.
사법화된 영역 중 대표적인 곳이 교육이다.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는 학생 사이 갈등은 ‘학교폭력’이라는 이름으로, 교사와 학생 사이 갈등은 ‘아동학대’라는 이름으로 사법화, 범죄화되는 정책을 활용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먼저 학교폭력을 보자. 2011년 피해 학생들이 학교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묵살되자 자살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이 극도에 이른 상황에서 2012년 도입된 학교폭력 정책의 핵심은 준사법기구(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학폭위) 실질화와 가해자 처벌 강화(학교생활기록부 기재)였다. 독립된 기구가 엄한 처벌을 내리면 폭력이 사라질 것이라는 구상이었다. 결과는 교육 소멸과 처벌 불평등이었다.
무거운 처벌이 필요한 사건뿐만 아니라 학생 간 사소한 갈등까지도 학교 안 법정인 학폭위로 쏟아져 들어왔다. 일단 사건화되면 교사의 교육적 개입은 제한된다. 중재의 노력이 ‘누구 편을 든다’ 욕먹기 딱인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유무죄 이분법만 있는 절차에서 ‘사과는 자백’이기에 학생들은 잡아떼는 방식만을 배워갔다. 현실의 법정처럼 학폭위도 평평하지 않다. 부모의 재력과 능력에 따라 누군가는 변호사를 선임하고 증거를 수집하고, 맞신고(맞고소)로 협박하며 사건 무마까지 시도한다.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학교나 교사의 도움조차 받지 못한 채 고립된다.
최근 고위층 부모가 자녀 학교폭력 사건에서 집행정지신청, 행정소송 등을 끈질기게 이어간 사실이 드러나 공분을 일으켰지만, 이건 사법화의 예정된 수순이다. 처벌을 강화하는 방식의 대응은 필연적으로 불복률을 높인다. 불복은 헌법상 권리(재판청구권)이기에 막을 방법도 없다. 이렇게 분쟁이 장기화하는 구조가 상례화된 상황에서 처벌은 처벌대로 지연되고 피해자의 고통만 커지고 있다.
다음으로 아동학대를 보자. 교사들의 요구는 이렇다. “학부모 민원이 곧바로 형사사건화되지 않도록 초중등교육법(유아교육법)을 개정하라!” 지금 학교에서는 민원 해결 방식으로 아동학대죄 신고가 지나치게 악용되고 있다. 신고만 이뤄지면 학교는 사라지고 경찰, 검찰 그리고 법원의 시간이다. 교사들은 언제든 아동학대로 신고돼 경찰서에 출석해야 할지 모른다는 스트레스에 떨고 있다. 최근 서울 서초구 초등학교 교사 자살과 동료 교사 수천명의 추모시위는 그들이 부득불 감당하고 있었던 좌절과 공포의 정도를 보여준다.
정부는 학생인권이 과잉 보장돼 교권이 추락했고, 그래서 학생인권이 제한돼야 한다고 말한다. 엉뚱한 진단과 대책이다. 아동학대를 방지하면서도 교사의 지도재량권을 보장하는 섬세한 정치와 정책,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노력 없이 그저 처벌 범위와 강도만 높여왔던 사법화, 처벌만능주의가 문제의 본질이다. 한 국책연구기관은 관련 보고서에서 “학부모와 학생, 교사 간의 갈등 심화는 사법적인 규범 및 절차와는 다른 목적의 공동체 규범 및 절차에 대한 몰이해와 연결되어 있다”고 진단했다. 교육공동체의 규범과 절차가 쪼그라든 상황에서, 교사와 학생은 처벌을 피하려고 각자도생한다.
결국, 사법화에 맞서 교육공동체의 규범과 절차를 복원해야 한다. 그런데 권력자들은 여전히 “한번 잘못하면 인생이 끝난다는 취지로 가해자 처벌을 강화하는 원 스트라이크 아웃제”를 해결책이라 운운하고 있다.
지난 10여년 흘러온 방향을 바꿀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