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경의 이방인, 초라함의 상대성]
2 _달라서 두려운 ‘나’들
아들의 고등학교에서 방과후 체육대회 연습이 한창이었다. 8시가 되자마자 아들이 주차장으로 달려 나왔다. 빨리 출발하자고 재촉했다. 조금 있으면 무슬림친구들이 앞다퉈 집에 가려고 출구가 혼잡할 거라고 알려줬다. “지금 다 예민해. 라마단이라 해가 져야 밥을 먹는데, 종일 굶고도 두 시간을 뛰었어.” 그 말이 웬지 반가웠다.
샌프란시스코 해안에서 불어온 미풍에 늦더위 열기가 밀려났다. 미시즈(Mrs.)링크는 예배시간보다 30분 일찍 교회에 도착했다. 새로 오는 신자가 갖춰야 할 자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차공간은 많지 않았다. 미니밴들 사이에 흰색 렉서스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리는 그녀의 모습을 아이를 앞세우고 본당으로 가던 젊은 부부들까지 힐끔거렸다. 미키모토 진주목걸이가 그녀의 우윳빛 재킷 사이로 찰랑였고 2캐럿 다이아몬드 반지가 간간이 빛을 반사시켰다. 70대 중반이라고 믿기지 않는 꼿꼿한 등과 곧게 뻗는 걸음이 챙 넓은 패도라 모자와 어우러져 주일 풍경에 우아함을 더했다. 1970년대 오산에서 그녀의 별명은 소피아 로렌이었다. 병상에 있던 남편을 떠나보내고 수년 만에 한인 교회를 찾은 날이다.
예배 10분 전, 중간 쯤 앉은 미시즈링크 옆으로 초로의 여성이 자리잡았다. 담임 목사의 아내라고 밝힌 사모는 자기 또래 어울릴 분을 만나지 못해 적적했는데 친구 삼고 싶다며 반겼다. 미시즈링크는 미소를 머금고 넌지시 물었다. “저는 국제 결혼을 한 여자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사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10년 전이다.
미시즈링크를 우리 식구는 김할머니라고 부른다. 가까이 사셨고, 덕분에 나의 두 아이가 한국 할머니의 밥정을 누렸다. 큰 아이 4학년 때 학교에서 ‘조부모와 함께하는 티타임’이 있었다. 모자까지 갖추고 예절을 익히는 자리였는데, 김할머니가 붉은 원피스정장과 버건디색 모자를 쓰고 함께했다. 행사가 끝나갈 즈음 그레이스 켈리를 닮은 트리샤의 할머니가 나를 불러 세우더니 사진을 찍어달라 했다. 자신의 새 친구라며 김할머니를 얼싸안고 포즈를 취했다.
김할머니는 오산에서 미군이던 링크할아버지를 만났다. 자식을 구김 없이 키우고자 80년대 초에 미국행을 감행했다. 왜, 할머니는 30년 넘도록 ‘국제 결혼’이란 단어를 쓰며 다가오는 한국인을 시험했을까? 어쩌면 할머니는 그 사모와의 만남을 금새 잊으셨을지 모른다. 지나가듯 내게 건넨 일상의 한 토막이었으니까. 나에겐 체기로 남아있다. 이민 와 만난 한인들에게서 미군 남편을 따라 정착한 할머니들을 담장 밖 사람들로 내치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나오고 이주한 이들도 엇비슷한 토를 달았다. 커피를 주문할 때마저도 영어 울렁증을 달래던 이들이다. 초기에 온 할머니들은 대부분 주류 사회로 들어가 취직하고 장사도 벌이며 경제력을 일궈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전쟁 속에서 유년을 보내고 상급학교를 포기하면서까지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며 살림을 일구던 딸들이다. 그러고도 집안 대사에 초대받지 못했던 시간을 부유한 노후를 보내면서도 헛헛해한다.
김할머니의 활약에 힘입어 아들은 미국 분위기로 더 스며들고 싶었는지 내게 평범한 점심을 싸달라고 요구했다. 아들이 원하는 평범함은 피넛버터젤리샌드위치였다. 식빵에 땅콩버터와 잼을 바르고 바나나를 납작하게 썰어 끼우는, 내 눈에는 간식거리로 밖에 안 보이는 허접함이다. 아들에게 볶음밥이나 김밥이 담긴 도시락은 동글동글한 알갱이들이 가득해서 아이들에게 ‘우웩’하는 반응을 유발한 상자였던 것이다. 그 즈음 작은 아이의 반에서 자원 봉사를 하고 나오는데 에밀리오 엄마와 마주쳤다. “두 번째 책 낸 거 축하해!”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에밀리오의 누나 반에서 자원 봉사를 하는데, 같은 반에 있는 내 아들이 불만에 찬 목소리로 “울 엄마가 두번째 책을 냈어. 그녀가 너무 바빠서 내가 정말 피곤해!”라고 외쳤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영어 발음 후지고 너네 엄마들과 친하지도 않는, 수업 보조 대신 복사만 하고 가는 우리 엄마가 멍청하지는 않아!’라는 과시였다. 아시아계 2명, 라틴계 1명 빼고 온통 백인인 학급이다. 큰 소리 한번 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담임 선생님을 믿는 마음이 있어서일 수 있다. 담임인 미스 길먼은 아무리 부모가 열성적으로 학교 일에 관여해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만 관대했다. 그 반에 인종차별은 없었다. 엘리트차별은 존재했다. 학년이 끝나고 미스 길먼은 유치원으로 쫓겨났다. 열성적인 백인 엄마들의 등쌀에 백인 교장이 내린 타협이었다.
아들의 허세는 그 이후로 다시 없었다. 한국인 티 나는 옷이나 물건을 드러내길 꺼렸고 차에서 즐겨 듣는 케이(K)-팝도 내가 창문을 열면 얼른 닫으라고 닦달했다. 케이 문화가 대세가 되고 자존감이 자리잡아가는 11학년(한국의 고2)까지 줄곧 그랬다. 외향적인 딸과 달리 남편 성격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신혼 초에 새 집으로 이사하고 한문으로 쓴 택호를 목판에 새겨 길목에서부터 보이도록 문 옆에 걸려 했는데 남편이 극구 말려 집에서 밖으로 나갈 때나 보이는 기둥 안쪽에 걸었다. 그 사정을 20년이 지나서야 헤아렸다.
콜로라도 덴버에서 자란 1981년생 스티븐 김과 이야기 나누던 작년이었다. 그는 유일한 동양인이자 한국인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한국에서 화학교사였던 그의 어머니는 한국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 이들 속에서 자식이 중국놈(chink 칭크) 소리를 들을까, 또 민간 외교관이라는 국민 의식에 한국을 알리는 수업을 자청하였다. 스티븐은 성실히 반복되는 그 시간이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광대가 되기 싫었어.” 자긍심을 심어 주려는 어머니의 엄청난 정성을 놀림감으로 만든 트라우마라고 부르다니. 스티븐은 한국 사람들 속에서 자란 한국 사람은 알 수 없다고 못박았다. 경찰관 소방관까지 다 한국인인 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나 혼자 다른 생김으로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받아야하는 수상한 눈빛을 견디는 그 기분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때는 케이-팝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경험이라는 빅데이터가 만들어낸 삶의 태도를 몸으로 수긍하게 되었다. 열등한 존재로 몰려 분노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다른’ 부류의 삶 말이다. 독산동에 사는 중학생 하은이는 친구들이 엄마 아빠가 조선족인 것을 모른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는 엄마가 일일교사로 중국 동포에 대해 소개도 하고 역사 교실도 열었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엄마에게 그만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은이와 스티븐 사이에는 30년의 시간 차가 있을 뿐이다.
‘다름’이 가난과 맞물렸을 때, 더욱 날선 배제와 조롱으로 파고든다. 보광동에 사는 아미르는 모로코인이라는 혈통, 곱슬머리, 갈색 피부보다 더 진저리 나는 ‘다름’이 운동화라고 했다. 학교에서 나이키나 아디다스, 퓨마 중 그 어느 것도 신지 않은 아이는 자기 뿐이라고 했다. 선생님도 나이키를 신고있다고. 아미르가 아빠를 조른 지 1년이 넘었다. 미등록자로 공사판을 전전하는 아버지로서는 금새 발이 자라 6개월 신고 버릴 물건에 그만한 돈을 지불할 능력도 상상도 할 수 없다.
지난 3월 말, 아들의 고등학교에서 방과후 체육대회 연습이 한창이었다. 아들은 18살이지만 차를 운전하지 않기에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8시가 되자마자 아들이 달려 나왔다. 빨리 출발하자고 재촉했다. 조금 있으면 무슬림친구들이 앞다퉈 집에 가려고 출구가 혼잡할 거라고 알려줬다. “지금 다 예민해. 라마단이라 해가 져야 밥을 먹는데, 종일 굶고도 두 시간을 뛰었어.” 그 말이 웬지 반가웠다. 나는 이만큼이나마 타인의 사정을 알도록 어우러진다면 그 다름이 무엇이 되던지 우리 안에 있는 다름을 구분하는 벽이 조금은 낮아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다를 수 있는 사정을 조금만 더 안다면 내 안에 있는 어린 아이도 세상을 끌어안고 자라날 기회를 갖지 않을까?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2002년 미국으로 이주,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인류 생존을 위한 10년 전략을 제시하는 대담집 <내일의 세계>, 세계 지성들과 코로나19의 원인과 미래를 탐색하는 <오늘부터의 세계>, 리베카 솔닛 등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대담 <어크로스 페미니즘>, 문명의 현재와 이를 만들어온 개인의 마음 운용 실체까지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세계 지성 29인과의 대담 3부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문명, 그 길을 묻다>, <사피엔스의 마음>, 현대미술 작가들과의 대담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이해인의 말>, <최재천의 공부>, 에세이 <나의 질문>을 펴냈다.
다를 수 있는 사정을 조금만 더 안다면 내 안에 있는 어린 아이도 세상을 끌어안고 자라날 기회를 갖지 않을까?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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