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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쟁의 교훈과 무책임의 체계

등록 2023-07-30 18:21수정 2023-07-31 02:38

1946년 5월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극동군사재판(도쿄재판) 법정에서 피고인들이 재판장 입정 때 자리에서 일어서 있다. 도쿄/교도 연합뉴스
1946년 5월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극동군사재판(도쿄재판) 법정에서 피고인들이 재판장 입정 때 자리에서 일어서 있다. 도쿄/교도 연합뉴스

[세계의 창] 야마구치 지로 | 일본 호세이대 법학과 교수

한국의 광복절인 8월15일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받아들인 날이다. 일본이 패배한 날이 이웃 나라가 해방된 날이라는 것을 일본인들은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전제로 전쟁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려고 한다.

전쟁에서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은 전쟁의 비극이다. 이 점은 전후 교육이나 저널리즘에서 강조돼왔다. ‘맨발의 겐’이라는 일본 만화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비참함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국가의 잘못된 정책 결정과 그것을 실행했던 정치 구조를 검증하는 것이다. 패전 뒤 연합국은 도쿄 재판에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군인·정치가에 대해 책임을 물었다. 그때 이 사람들 중 상당수가 개인적으로는 전쟁에 반대하거나 빨리 끝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정책을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거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정부 내 ‘공기’(분위기)를 거스르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전후 일본 정치학의 개척자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는 이 점을 포착해 ‘무책임의 체계’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자신에게 불리한 현실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큰 마찰을 가져오는 정책 결정에 대해서는 권한이 없다며 회피한다. 희망적 관측에 근거해 행동하면서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자신을 속인다. 이런 태도가 쌓여 사태 악화에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이 무책임한 지도자의 행동 양식이었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독일은 지도자의 세계 정복이라는 야망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반면 일본의 전쟁은 무책임한 지도자가 상황을 수습하지 않고 질질 끌고 가면서 결국 파국에 이르렀다.

마루야마가 이런 분석을 제시하고 전후 일본의 정치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 지 75년이 지났다. 일본은 전쟁을 반복하지 않았지만, 무책임의 체계를 개선하지는 못했다. 1990년 전후 ‘거품 경제’가 끝나고,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쇠락의 시간을 보냈다. 경제와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일본은 패배를 거듭하고 있다. 그것은 무책임의 체계가 빚어낸 결과다.

최근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 아베 신조(1954~2022) 정권 시절 시작된 대대적인 금융 완화 정책이다. 아베 전 총리가 보낸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2% 물가 상승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국채 대량 매입을 계속했다. 구로다 총재는 임기 10년 동안 물가 상승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최근 일본의 물가 상승은 자원·곡물 등의 세계적인 가격 상승의 결과다.

구로다 총재 아래서 일한 몬마 가즈오 전 일본은행 이사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금융정책 결정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은행 정책으로 2% 물가 상승을 달성할 수 없고, 일본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행이 소극적이기 때문에 경기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구로다 총재의 대대적인 금융 완화를 지지했다.”

이 인터뷰를 보면서 (태평양) 전쟁 시작 때가 생각났다. 해군 지도자는 미국과 전쟁을 벌여 이길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정부가 어떻게든 전쟁을 한다면 첫번째 싸움은 대담하게 하자며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일본의 금융정책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됐다.

무책임의 체계를 타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치가·관료·학자들이 사실에 입각해 자유롭게 논의하고, 결정 과정은 명확하게 밝혀두는 것이다. 패전 뒤 8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일본은 실패를 마주할 용기나 성실함을 갖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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