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 수신료와 전기요금의 분리 납부가 가능해진 첫날인 지난 1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한국전력공사 남서울본부 전력사업처에서 고지서 작업을 하는 관계자의 모습. 그 앞으로 취재진 요청으로 부착된 수신료 분리 납부 관련 안내문이 보인다. 연합뉴스
[열린편집위원의 눈] 이준형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미디어문화연구 박사)
미디어 연구자로서는 기시감이 드는 시절이다. 십여년 전쯤 보수 정권이 자행한 ‘언론 장악’이 ‘촛불 시위’를 거친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온 보수 정권은 ‘바이든-날리면’ 보도를 두고 문화방송(MBC)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불허하더니, 느닷없는 수신료 분리 징수로 한국방송(KBS)을 압박하고 있다. 와이티엔(YTN)도 민영화 수순을 밟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윤석열 정권의 야욕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한국 사회의 미디어다. 왜 미디어라는 장은 다시 아수라장이 되고 있는가? 연구자들은 한국 언론의 높은 ‘정치병행성’을 지적한다. 정치병행성은 언론의 체제구조와 정당의 체계가 병행하는 정도를 뜻한다. 적당한 정도의 정치병행성은 저널리즘과 공존할 수 있으나, 극단화된 정치병행성은 저널리즘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보수 신문들을 중심으로 틀이 잡혀온 한국 언론의 정치병행성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를 지나며 공영방송을 주무대로 삼아 크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당시 정권은 트집을 잡아 공영방송 이사들과 사장들을 갈아치우고 보도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촛불’에 힘입어 정권을 탈환한 민주당 세력도 이 틀을 크게 바꾸고 싶어하지 않았다. 방향이나 강도는 달랐지만, 그 방식은 다르지 않았다. 한겨레 등 이른바 ‘진보’ 언론들도 이러한 정치병행성의 영향력 속에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5년이 지났고, 정권은 다시 보수당의 차지가 되었다. 게임의 틀이 그대로이니 예전의 ‘선수’들이 호출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언론 역사박물관에서나 추억할 법한 자들의 이름이 오늘날 거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시민들의 인식에 있다. 언론 못지않게 ‘정치병행’하고 있는 시민들은, 언론의 정치병행성을 우려하기보다는 장려하는 쪽에 가까워져 있다. 우리 당, 우리 정치인 편을 드는 언론이 ‘참 언론’으로 불린다. 윤석열 정권의 언론 장악에 대한 시민사회의 냉소적 관망도 이런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수신료 문제에 대해 시민들이 보이는 반응이 이를 분명히 보여주는데, 민주당 지지자들이 ‘문재인 정부를 돕지 않았던 케이비에스, 꼴 좋다!’고 외면할 때, 반대편에서는 ‘좌파방송 케이비에스, 이제는 굴복시키자!’고 소리를 높인다. 양극화된 시민사회의 정파적 인식과 스스로 믿는 것을 진실로 취급하고자 하는 탈진실적 욕망 속에서 ‘미디어 공공성’이나 ‘비판적 저널리즘’과 같은 담론은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돌파구는 있는 걸까.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민주주의란 계속해서 재발명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인 남성 전유물이었던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점차 여성, 유색인종으로 확장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저널리즘도 재발명되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듯하다. ‘감시와 비판’, ‘객관주의’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발명되었던 근대적 저널리즘은, 오늘날 한국에서 극화된 정치병행성과 탈진실의 확장이라는 조건 속에서 새롭게 변모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한겨레는 2022년 10월, 한국 언론 역사상 처음으로 ‘한겨레 신뢰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사실과 의견의 분리, 주관과 객관 등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기본 가치들에 대한 검토뿐만 아니라 권력 감시, 불평등, 기후위기 등 한겨레가 지향하는 가치들에 대해서도 빼곡히 적고 있다.
저널리즘 규범과 뉴스 가치에 대한 판단을 잘 조화시켜보겠다는 의지처럼 느껴졌다. 한국 저널리즘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재발명의 기회다. 한겨레가 그러한 재발명에 가장 가까운 언론 중 하나라고 믿는다.
※‘열린편집위원의 눈’은 열린편집위원 7명이 번갈아 쓰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