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루이 앙투안 레옹 드 생쥐스트 (1767~1794)
야심이 컸다. 어린 시절, 대도시 파리에서 성공하고 싶다며 집안 집기를 훔쳐 가출했다. 어머니는 그를 사립 교도소(감화원)에 보냈다. 출소 뒤 변호사 공부를 하려 다시 찾은 파리, 1789년 바스티유 습격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대혁명의 시작이었다.
루이 앙투안 레옹 드 생쥐스트는 고향에 돌아와 여러차례 선거에 출마해 많은 표를 받지만 번번이 당선무효됐다. 1767년생으로 피선거권 연령인 스물다섯살이 채 안 됐다는 이유였다. 1792년에야 생일을 넘겨 겨우 국민공회 의원으로 당선된다. 중앙 정계에서 로베스피에르와 가까워진다. 둘 다 개인 욕심 없이 혁명만을 생각했다.
1793년 특임위원이 되어 혁명군을 이끌기 위해 동남쪽 알자스 지방에 갔다. 나이가 어리다고 장교들이 얕잡아 볼까 봐 당시 프랑스 사람답지 않게 콧수염도 잠시 길렀다. 도착해 외국 군대와 내통이 의심되는 이들을 처형했고, 앞장서서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무찔렀다.
파리에 돌아와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공포정치를 이끌었다. 그의 전기를 쓴 랠프 코른골트는 “두 사람이 없었다면 공포정치는 더 잔혹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과격한 사상가’로 사람들을 너무 많이 처형한 것은 사실이다. 옛 혁명 동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베르는 과격하다고, 당통은 과격하지 않다고 사형시켰다. 생쥐스트 자신도 일기에 썼다. “(사람들이) 공포정치에 지겨워한다. 독한 술에 혀가 마비되듯.”
스물여섯 나이에 국민공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급진적인 토지개혁 법안을 밀어붙여 무산계급의 지지를 받았지만 적도 많아졌다.
1794년 혁명군을 이끌고 플뢰뤼스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파리에 돌아왔더니 옛 동지들이 반대파가 돼 있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생쥐스트는 그가 따르던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구금된다. 파리 민중이 봉기를 일으켜 잠시 풀려났지만 다시 체포됐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날이 1794년 7월28일이다.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