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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진순 칼럼] 망해도 싼 공영방송은 없다

등록 2023-07-25 18:42수정 2023-07-26 02:38

놀랍게도 현행법 어디에도 공영방송을 정의하거나 공영방송의 특별한 책무와 역할을 규정하는 조항이 없다. 편향성 시비를 예방하려면 공영방송 이사 구성을 거대 양당이 7 대 4, 혹은 6 대 3으로 나눠 가지는 무법적 관행부터 청산해야 한다. 공영방송 사장 선출의 결정적 권한을 무작위 추첨으로 구성된 시민단에 주고….
박성중 간사 등 국민의힘 소속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들이 지난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KBS의 지상파방송사업자 재허가 점수 미달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성중 간사, 김영식 의원, 윤두현 의원, 홍석준 의원. 연합뉴스
박성중 간사 등 국민의힘 소속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들이 지난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KBS의 지상파방송사업자 재허가 점수 미달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성중 간사, 김영식 의원, 윤두현 의원, 홍석준 의원. 연합뉴스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어릴 때 외갓집에서 자랐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어렵사리 장만한 ‘테레비’가 외할머니에겐 보물단지였다. 솜씨 좋은 문간방 아저씨가 안방 농짝을 개조해서 텔레비전 수상기가 쏙 들어갈 만한 안성맞춤의 공간을 만들어 주셨다. 닫아두면 수상기는 물론 전선까지 감쪽같이 가려지니 도둑이 들어와도 모를 거라며 할머니는 무릎을 치셨다.

그날 이후 매달 싸움이 벌어졌다. 시청료를 걷으러 징수원이 오면 할머니는 황급히 내게 손짓으로 장롱문을 닫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징수원 아저씨가 “안테나가 달린 걸 보고 왔다니까요”라고 할 때 나는 심장이 콩알만 해졌지만 할머니는 “아, 우리 집엔 테레비 읎다니깐?” 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안방 문을 열어 보이셨다. 어느 토요일 오후, 문간방 식구들까지 <전설의 고향> 재방송을 단체 관람하느라 티브이 앞에 넋을 놓고 있을 때 징수원 아저씨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결국 들통이 나고 말았지만, 그 뒤로도 할머니는 ‘테레비 고장 나서 안 본다’면서 시청료 징수원과 옥신각신하곤 했다.

시청료에 얽힌 어린 시절 추억은 <시네마 천국>처럼 애틋하고 정겹지만 요즘 터지는 수신료 논쟁은 심란스럽기만 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신료 분리징수를 추진한 것은 매번 야당이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한나라당이,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때는 민주당이, 문재인 정부 시절엔 자유한국당이 수신료 분리징수안을 내놨다. <케이비에스>(KBS)가 ‘관제 언론으로 정권 홍보성 보도를 하니’ 수신료 재원을 압박해 견제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특이하다. 야당이 아니라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수신료 분리징수를 속전속결로 강행한다. 대체 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6월20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한쪽 주장만 일방적으로 퍼 나르는 방송, 이건 공영방송이 아니다. 민주당과 민노총의 프로파간다(선전) 매체 아니냐?”고 맹공을 퍼부었다. 예전에는 공영방송이 집권당에 귀속되는 전리품 같은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데 격분한 것일까?

국민 눈높이에 비추어 공영방송은 안일하고 태만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다원화된 사회의 갈등과 대립을 슬기롭게 풀어나갈 공론장을 만들기보다 자발적 당파성으로 소모적 정쟁을 부추긴 일부 언론인들의 행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유명인 집 앞에서 뻗치기를 하고 가십성 기사를 내는 데 들이는 공력에 비해, 소외된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의 현실을 밀도 있게 취재하는 노력은 여전히 희소하다. 그런 방송을 친노동자 성향의 좌파로 규정하는 건 터무니없는 과대평가다.

사람들은 간절한 기대와 신뢰가 무너질 때 “너는 어떻게 맨날 그 모양이냐?”고 성을 내지만, 사실 80년대 ‘땡전뉴스’가 판을 치던 시절과 지금의 언론 행태가 같은 건 아니다. 80년 광주 학살을 외면한 <엠비시>(MBC)에 화염병을 던진 광주 시민들의 울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서 공영방송 취재단에 야유를 퍼붓던 국민의 분노가 언론 종사자들의 각성과 성찰에 채찍이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느 집단에나 권력에 빌붙어 출세하려는 모리배들은 있지만 그걸 부끄럽게 여기고 불이익을 감수하며 싸운 언론 노동자들도 있다.

문제가 있다면 공영방송을 없애거나 약화시킬 게 아니라 공영방송을 진짜 공영방송다워질 수 있도록 강화해야 한다. “어떻게 공영방송이 그럴 수 있냐?”고 국민으로서 질타하는 것도 그 상대가 공영방송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공영방송을 사기업에 넘기거나, 재벌이 좌지우지하는 광고시장에 목매게 하는 게 어떻게 공영방송 개혁인가? 수신료란, 돈이 안 되더라도 공익에 필요한 일을 제대로 하라고 국민들이 공영방송에 걸어놓는 저당권이다. 국민의 지분을 국민이 행사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영방송법’을 제정하는 일이다. 놀랍게도 현행법 어디에도 공영방송을 정의하거나 공영방송의 특별한 책무와 역할을 규정하는 조항이 없다. 편향성 시비를 예방하려면 공영방송 이사 구성을 거대 양당이 7 대 4, 혹은 6 대 3으로 나눠 가지는 무법적 관행부터 청산해야 한다. 공영방송 사장 선출의 결정적 권한을 무작위 추첨으로 구성된 시민단에 주고, 방송 모니터링과 자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각 방송사의 시청자위원회에 공영방송의 경영과 노무, 편성 전략에 대해서까지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법적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공영방송이 권력자들에게 길들지 않도록 그 주인인 국민이 칼자루를 잡아야 한다. 망해도 싼 공영방송은 없다.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릴 순 없다. 그 아이 국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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