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의 기억 제주 _05
그 뒤로도 김훈과 사진의 한계에 관해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다. 찍을 수 없고, 찍혀지지 않는 이미지들에 매달리는 나의 내면을 그는 가엾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사진이 그림이나 글처럼 과거의 상상 속 조각들을 모아 과거를 소환할 수 없다는 사실이 힘들다. 시인은 주어, 동사만으로도 수많은 이야기를 토해 낼 수 있지만, 수십만개 입자(픽셀)가 담긴 나의 학살터 사진 한컷은 그저 공허한 2차원 평면에 불과하다고 자책한다.
제주섬 학살터를 헤매고 다닐 적에 한번은 4·3 당시 일상적으로 총살이 자행됐다는 서귀포시 표선백사장을 찾았다.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해 이곳에 상주하고 있던 토벌대는 표선면사무소(현 제주은행 표선지점) 옆에 임시 움막을 만들어놓고 주민들을 불러다 신문하고 표선백사장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홍춘자(1942년생, 여)씨는 “내가 어렸을 때지만, 사람들이 손을 뒤로 쫄쫄쫄 굴비처럼 묶고 일렬로 가더라고. 쏘아버리니 구덩이로 들어가는 거까지는 봤어”라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제주4·3유적 서귀포시편> 758쪽) 2019년 12월 발간된 <제주 4·3사건 추가진상보고서>(199쪽)를 보면, 표선백사장 집단 학살 희생자 가운데는 한살배기 등 7살 이하 어린아이도 14명이나 포함됐다. 뿐만 아니라 희생자 명단에는 여성과 노인이 유독 많았는데, 가족 중 한 사람(주로 젊은 남성)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란 이유로 총살된 이도 많기 때문이다. 표선백사장 이곳저곳에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두명씩 끌려 나와 마을 주민 234명이 학살됐다.
수많은 학살터를 헤매고 다니는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게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학살 당시 현장은 사라지고 없다는, 그래서 사진으로 재현해낼 수 없다는 부재(不在)에서 오는 무기력감이었다. 특히 표선백사장에서 그랬다. 2017년 11월27일 처음으로 학살터를 찍기 위해 찾았는데 온종일 서성이다 좌절하고 되돌아서야 했다. 사진은 빛의 찰나 순간을 잡아내는 매개체인데, 총구에서 불을 뿜는 그 순간의 빛은 표선해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 버렸다. 총살 당시 굉음, 솟아나는 붉은 피, 울부짖는 비명은 사라진 지 오래고 미세한 조각, 흔적조차 남지 않았는데 사진으로 뭘 표출할 수 있겠는가. 이튿날 다시 표선해변을 찾아 과도하게 노출을 늘려 백사장을 하얗게 표현한 사진을 찍었다. 총소리보다 먼저 도달한 둔탁한 총탄이 희생자 몸속을 뚫고 들어올 때,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을 섬광처럼 표현해보자는 생각에서였는데, 얄팍하고 편협한 발상이었다.
표선백사장 학살터에서 문득 연극연출가 이경성의 말이 떠올랐다. 지난해 제주4·3을 다룬 연극 <섬 이야기>를 연출한 그는 “연극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연극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는 파악하고 시작하자”라고 말한 적 있다. 나는 그의 말에서 ‘연극’을 ‘사진’으로 치환해, 사라진 학살터 현장에서 사진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내려고 했지만 찾지 못했다. 연극과 달리 저널리즘에서는 사진기 앞에 펼쳐진 상황에 관여하거나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나의 무기력함을 다시 확인할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글은 사진보다 훨씬 자유롭고, 표현력의 확장성이 크다. 나는 언론사 선배이기도 한 소설가 김훈에게 글 쓰는 사람이 부럽다고 자주 말했다.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은 쓰고자 하는 것들을 상상 속에서 조립해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지만, 사진은 현실 공간 속에서 눈앞에 벌어진 물리적 조건을 넘어설 수 없지 않냐고. 세월호 참사를 기록한 본인의 졸저 다큐멘터리 사진집<팽목항에서> 해설에서 김훈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장르의 경계선 앞에 이르러, 그것을 넘어서지 못해서 답답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 언어는 시각이나 청각처럼 관능의 힘으로 대상을 파악하기가 어렵고, 대상과의 직접적 관계를 설정하거나 대상이 시간과 공간 속에 처해 있는 표정과 질감을 전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인간이 사용하는 개념들이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은 인간의 언어가 의존하고 있는 문법에 따라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이해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그와 나는 서로의 한계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던 셈이다.”
그 뒤로도 김훈과 사진의 한계에 관해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다. 찍을 수 없고, 찍혀지지 않는 이미지들에 매달리는 나의 내면을 그는 가엾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사진이 그림이나 글처럼 과거의 상상 속 조각들을 모아 과거를 소환할 수 없다는 사실이 힘들다. 시인은 주어, 동사만으로도 수많은 이야기를 토해 낼 수 있지만, 수십만개 입자(픽셀)가 담긴 나의 학살터 사진 한컷은 그저 공허한 2차원 평면에 불과하다고 자책한다.
올해 3월 다시 표선백사장을 찾았다. 이번에는 사진을 딱 한장만 찍겠다며 필름 크기가 세로 4인치, 가로 5인치인 대형 카메라를 가져갔다. 4·3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는 피사체인 백사장을 오랜 시간 바라보며 학살 당시의 순간들을 떠올리고 셔터를 톡 하고 눌러 한컷만 찍자…. 실제로 아날로그 대형필름 카메라는 한번에 한컷만 찍을 수 있다. 그림이나 서예에서 붓이 바뀌면 표현력이 바뀌듯, 필름의 크기와 렌즈의 화각이 달라지면 피사체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도 있겠지, 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끔찍했던 학살터 백사장을 사진적 언어로 표현해보려는 시도는 가련한 몸부림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찍은 사진들은 이야기하거나 울부짖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냄새도 없다. 그저 침묵하고만 있을 뿐이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올해 3월15일 제주 서귀포시 표선해변에서 대형필름(세로 4인치×가로 5인치)으로 찍었다. 사진에 검은 테두리가 보이는데, 촬영 당시 렌즈의 화각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위해 애초 촬영된 이미지에서 인위적 트리밍(자르기)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 표선해변에는 4·3 당시 학살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지도상 지번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해변으로 밀려왔던 파도가 먼바다로 빠져나간 뒤 남은 모래톱에 켜켜이 쌓인 물결 자국이 그간 세월을 상징하는 듯하다. 김봉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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