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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한라산 넓궤는 은신처이자 학살터였다

등록 2023-05-02 19:15수정 2023-05-03 02:35

제노사이드의 기억 제주 _02
“11살 가을(1948년 11월15일) 아침이었다. 순경들이 마을 사람들 이름을 한명씩 부르더니 그 자리에서 총을 쏴 남자들 10명이 죽었고, 1명은 도망쳤다. 그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큰넓궤에 몸을 숨겼다. 큰넓궤는 곶자왈 부근이어서 검은 개(토벌대 경찰)들이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목이 마르면 동굴 천장에서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을 입을 벌려 받아먹으면서 죽지 못해 짐승처럼 살았다. 한번은 하늘이 너무 보고 싶어 아버지에게 ‘밤하늘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고 말씀드리니까 ‘시국이 편안해지면 나가자, 지금 나가면 죽어’라고 말씀하셨다.”

2016년 4월11일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 앞에서 홍춘호 할머니가 역사기행 일행들에게 4·3 당시 동굴 속 생존기를 들려주고 있다. 할머니의 말은 제주섬의 언어여서 절반 이상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귀 기울여 듣던 사람들도 먼 산을 보거나 아이들은 햇볕을 피해 그늘에서 머물렀다. 김봉규 선임기자
2016년 4월11일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 앞에서 홍춘호 할머니가 역사기행 일행들에게 4·3 당시 동굴 속 생존기를 들려주고 있다. 할머니의 말은 제주섬의 언어여서 절반 이상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귀 기울여 듣던 사람들도 먼 산을 보거나 아이들은 햇볕을 피해 그늘에서 머물렀다. 김봉규 선임기자

<제주 4·3사건 추가 진상조사보고서>(2019년)는 4·3 당시 제주도민 2만5천~3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인명피해다.

만약 제주섬에 한라산이 없었다면 더 많은 이들이 희생됐을 것이다. 총부리를 들이대고 중산간 마을을 들쑤시고 다녔던 토벌대를 피한 민초들을 품어준 것은 한라산 자락의 넓궤(동굴)와 곶자왈(제주의 숲)이었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17일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됐다. 이어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이듬해 2월까지 약 넉달 동안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집단으로 총살하는 등 제주도는 참상을 겪는다. 4·3사건 희생자 대부분이 이 시기에 희생됐다. 이때 피난길에 나선 주민들 상당수는 두려움에 해안 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한라산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넓궤와 곶자왈은 그렇게 주민들의 은신처가 됐지만, 토벌대에 발각되는 순간 집단학살터가 되기도 했다. 조천읍 선흘리 주민들의 은신처였던 도툴굴(반못굴), 목시물굴, 벤벵듸굴 등에서 사람들이 굴 밖으로 나오는 즉시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한 게 대표적이다.

2016년 4월11일 제주 남서부 안덕면 동광리 주민들의 은신처였던 큰넓궤(큰동굴)를 찾았다. 제주 4·3을 다룬 영화 <지슬>(2013년)의 실제 무대이기도 했던 큰넓궤는 평소에는 안전상 이유로 통제됐다. 동굴 길이는 180m가량이었는데, 중간 부분 10m가량은 높이가 50~60cm 정도로 낮았다. 사진 장비를 휴대한 채 팔꿈치와 무릎으로 기어서 겨우 앞으로 나아가는데, 안전모가 거칠고 뾰족한 암반에 부딪히면서 탕탕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귓전을 때렸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거칠고 어둡고 좁은 동굴에서 다시 기어 나오니 파란 하늘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동굴 밖에서는 홍춘호 할머니(당시 78)가 동굴을 체험하고 나온 ‘4·3 역사기행’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 할머니가 60여년 전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제주섬의 언어라 절반 이상은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대략 이런 이야기였다.

“11살 가을(1948년 11월15일) 아침이었다. 순경들이 마을 사람들 이름을 한명씩 부르더니 그 자리에서 총을 쏴 남자들 10명이 죽었고, 1명은 도망쳤다. 그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큰넓궤에 몸을 숨겼다. 큰넓궤는 곶자왈 부근이어서 검은 개(토벌대 경찰)들이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목이 마르면 동굴 천장에서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을 입을 벌려 받아먹으면서 죽지 못해 짐승처럼 살았다. 한번은 하늘이 너무 보고 싶어 아버지에게 ‘밤하늘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고 말씀드리니까 ‘시국이 편안해지면 나가자, 지금 나가면 죽어’라고 말씀하셨다.”

결국엔 큰넓궤에 숨어있는 사실이 토벌대에 발각됐다. 토벌대가 작전을 펴기 전에 어떻게든 동굴을 빠져나와야 했다. 홍 할머니는 40여일 만에 밖으로 나오니 하얀 눈이 무릎 가까이 쌓여 있었고, 그때야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토벌대를 피해 다니던 중 남동생 3명을 잃었고,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아버지도 얼마 안돼 돌아가셨다.

큰넓궤를 빠져나온 마을 사람들은 무작정 산으로 발길을 향하다 영실 부근 볼레오름에서 총에 맞아 죽고, 일부는 붙잡혀 정방폭포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토벌대는 유족들의 주검 수습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개월, 길게는 1년 뒤 찾아간 총살 현장의 주검들은 이미 썩어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었다. 특히 정방폭포에서는 여러차례 총살이 이뤄져 쌓여 있는 주검더미 속에서 가족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렇게 동광리에서만 희생된 마을 사람이 172명에 이른다.(<제주 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 219쪽)

장편서사시집 <한라산>의 저자 이산하는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산 자는 죽은 자보다 더 말이 없었다. 아무데나 질러대는 총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것도 죄가 될 수 있는가. 한국현대사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2018 년 복원판 저자 후기)이라고 토해냈다. 나는 4·3사건 학살 터 흔적을 찾아 제주행 비행기에 탑승해 창밖 한라산을 보노라면 환영에 빠지곤 한다. 토벌대를 피해 넓궤와 곶자왈로 떠돌던 한맺힌 이들의 퀭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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