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노사 모두 받으려고만합리적 행동기준·문화 만들어가야노사전략 수립 지휘탑은 노사정위”
대선 때 이회창 지지했던 한국노총위원장 대통령 면담서 불만 토로“청와대에 민주노총 쪽 인사들만…”
스웨덴 같은 노사정대타협 구상국제표준 벗어난 제도·관행 시정안노사정위 논의 뒤 공론화 나서기로
노 대통령 대우일렉 인천공장 방문즉석연설에 노동자들 박수갈채 화답“기업도 법 이전에 스스로 투명경영”
2003년 6월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전국 46개 지방노동관서 근로감독관 178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권기홍 노동부장관, 시민석 서울지방노동청 근로감독과장, 노 대통령. 노무현사료관 제공
4월30일(수) 노무현 대통령 주재 노동 회의가 집무실에서 열렸다. 권기홍 노동부 장관은 근로감독관 숫자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동계에서 ‘선생님’으로 불리는 김금수 노사정위원장은 노동부 공무원들의 이동이 잦아 전문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지적했다. 신홍 중앙노동위원장은 2002년 노동위원회 조정 건수가 1030건인데 조정 성립 비율이 44%로 1999년(22%)의 두배로 양호한 편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민정수석은 노동위원회 인적 구성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그럴 용의는 없느냐고 신홍 위원장에게 물었다.
노 대통령은 오늘은 노동 문제의 큰 틀을 논의하자고 말했다. “노동 측은 세계표준(global standard)을 주장하면서 노조 설립의 자유를 요구하고, 필수공익법인의 직권중재를 요구한다. 빈발하는 노조 가압류 문제에도 불만이 많다. 그 반면 사용자 측은 한국 노조가 세계에서 최고 강경 노선이라고 주장한다. 노동 문제 중에는 경영권과 근로조건의 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구분이 애매한 경우가 있다. 노사 양측이 받으려고만 하고 주는 데는 인색하다. 장차 노사의 합리적 행동기준, 문화, 제도를 형성해가야 한다. 해고가 부자유스러워 발생하는 대량의 비정규직에 대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지 매우 어려운 문제다. 현재 노사협상은 정규직 위주이고 비정규직을 무시하고 있다. 하청기업 노동자들도 무시하고 차별한다. 노사정위원회에 민주노총이 계속 참여를 거부하고 있는데, 들어오라고 애걸할 필요는 없다. 노사 간 큰 질서의 그림을 제시하자. 큰 그림 속에서 노사, 노사정, 청와대, 중노위의 역할이 각각 무엇인지 생각하자. 노사분규 처리는 노동부 장관이 담당하되 청와대 민정수석실, 정무수석실과 협조할 필요가 있다. 노동전략 수립의 지휘탑은 노사정위가 돼야 한다.” 노동 문제, 노사관계에 대한 노 대통령의 기본적 생각을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2003년 4월11일 오전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노사정지도자회의가 열려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맨 왼쪽), 김금수 노사정위원장(왼쪽에서 네번째), 권기홍 노동부장관(왼쪽에서 다섯번째), 양대노총 위원장, 경총 부회장 등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5월28일(수) 12시 노사협력 모범 수상자 오찬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있었다. 노 대통령은 본인의 변호사 시절을 회고하면서 노조 설립을 도와준 예가 3천건 정도는 될 것이고 문재인 수석도 노동 변호사를 계속했다며 “최근에 와서 노사 분규는 대통령 지시와 다르게 처리해서 다소 불만스럽지만 그냥 수용하겠다. 권기홍 장관과 문재인 수석은 잘못 뽑은 것 같다”고 농담을 했는데 다음 날 언론에 그대로 보도가 됐다. 노 대통령은 평소 장난기가 많고 농담을 자주 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웃고 좋아하는데, 언론이 앞뒤 상황과 문맥을 빼고 보도하면 이상한 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많은 구설수와 평지풍파에 시달렸다.
5월29일(목) 9시 수석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문재인 수석은 ‘왕수석’이라는 말이 있고 집사람(권양숙 여사)과 주위 사람들이 모두 문 수석이 전면에 나서는 걸 반대하지만 노동 현안을 잘 아는 사람이 조정하는 것이 필요해서 자꾸 나서게 된다. 화물연대, 철도, 나이스 문제 등에 다른 참모들도 적극 나서달라”고 말했다. 수석회의 직후 한국노총 이남순 위원장의 대통령 면담(백악실)에 배석했다. 조흥은행 매각, 한전의 배전 분할 문제를 의논했다. 이 위원장은 청와대에 한국노총 출신은 한명도 없고 민주노총에 가까운 사람은 여럿이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2002년 철도 파업 해고자 48명 복직 요구를 당시 이근식 행자부 장관이 거부했는데 이들이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으로 가자마자 바로 복직됐다. 이 일로 한국노총은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고 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에 가까운 사람들이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적극 도왔고, 한국노총은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6월1일(일) 오후 6시 관저 만찬에 경제부처 장관들이 참석했다. 노 대통령이 노사관계 개혁을 정책실장이 챙기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정부가 노조에 임금인상 자제를 요구할 수 있나. 공기업 임금 인상 억제도 곤란한 것 아닌가?”라고 묻기에 내가 네덜란드와 스웨덴 예를 들어 “강력한 노조일수록 사회적 책임성을 갖고 행동하며, 과도한 임금인상을 자제한다. 특히 수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경제에서는 임금인상 자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답했다.
6월19일(목) 9시 대통령 주재 수석회의에서 철도노조가 4·30 청와대 철도 합의(
23화, ‘철도 문제’ 참조) 이후 철도청의 협의 요청을 세차례 무시하고 연금 불이익을 이유로 6월28일 파업에 들어갈 예정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노 대통령은 “요즘 노동운동은 도덕성, 책임성을 상실한 게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6월20일(금) 밤 9시 정부청사 별관에 있는 민정수석실에서 노동대책 회의가 열렸다. 김금수, 권기홍, 문재인, 박태주, 권재철이 참석했다. 모두 최근 노동 관련 노 대통령 발언이 뭔가 입장 변화 때문 아닌지 우려했다. 그래도 예년에 비해 파업일수도 감소했고 상황은 낙관적이라고들 하기에 나는 반론을 제기했다. 정권 초기 힘이 있을 때 빨리 네덜란드, 아일랜드, 스웨덴 같은 노사정대타협 모델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11일(금) 아침 7시30분 김금수, 권기홍, 문재인, 노동부의 노민기 노사국장과 함께 며칠 뒤에 있을 대통령 보고 안건을 검토했다. 노사정위원회 보고는 추상적 10대 원리를 천명하는 내용이고, 노동부 쪽은 국제표준에 어긋나는 각종 제도나 관행을 시정하겠다는 구체적 내용이었다. 노에 유리한 것도 있고 사에 유리한 것도 있는데 대체로 노보다 사에 유리한 흥정이 될 듯했다. 그걸 보더니 김금수 위원장은, “왜 분란을 일으키는가? 이대로 나가면 전쟁이 일어난다”며 강력 반대했다. 그러나 나머지 참석자들은 찬성했다.
7월14일(월) 3시 대통령 주재 노동 관련 회의가 열렸다. 김금수 위원장은 추상적인 10대 원칙을 천명했고. 권기홍 장관은 구체적 사항을 제시했다. 예상대로 노 대통령은 권기홍 장관 안을 선호했다. 8월 중 연구회에서 내용을 다듬어 중간발표하고 10월 말 노사정위원회에 넘겨 본격 논의한 뒤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2003년 7월28일 노무현 대통령은 인천시 용현동에 위치한 우수 수출기업인 대우일렉트로닉스를 방문해 임직원들을 격려하고 오찬간담회를 가졌다. 노 대통령은 노사 양측이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경영 정상화를 이룬 데 대해 노고를 치하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7월28일(월) 11시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천공장을 방문했다. 원래 1만8천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4천명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을 하고 워크아웃을 통해 회생한 세계 10대 가전회사 중 하나다. 인천공장에선 노동자 800명이 소형 냉장고를 생산하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즉석연설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노동자들이 ‘노무현 파이팅’을 연호했다. 직원식당에서 3백명이 함께 설렁탕을 먹었다. 노 대통령은 노동운동이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며 노사 쌍방의 양보를 강조했다. 기업 쪽도 법과 공권력 투입을 요구하기 전에 스스로 투명경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3년 7월30일 노조의 파업에 따른 생산 차질로 수출용 차량의 재고가 바닥나면서 텅 빈 현대자동차 수출선적 부두에서는 트럭과 버스 수십대가 마지막 수출용 선박에 실리고 있다. 연합뉴스
7월31일(목) 9시 수석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현대차 파업에 긴급조정권을 발동하기로 한 전날 총리 주재 국정현안조정회의의 결정은 긴급조정의 법적 요건이 불충분해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런 사안은 대통령과 의논해야 할 것 아니냐고 권오규 정책수석을 질책했다. 정부 안에 이견이 있다고 언론에 나가도 좋다고 대통령이 말하자 김희상 국방보좌관은 “대통령 말씀이 옳지만 언론에 나가면 정부 혼선이라고 비판받을 겁니다”라고 반대했다. 나도 생각이 같다며 반대하자 대통령이 물러섰다. 회의 뒤 권오규 수석한테 들으니 어제 회의에서 긴급조정권 발동을 주장한 사람은 뜻밖에도 문재인 수석(오늘부터 휴가)이었는데 장관들은 의견이 없었고, 본인은 좀 늦추자고 주장했다니 권 수석은 억울하게 대통령 질책을 받은 셈이었다.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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