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좌파도 ‘법과 질서’를 구호로 삼을 수 있어야 [세계의 창]

등록 2023-07-16 18:37수정 2023-07-17 02:37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2021년 1월6일 오후(현지시각) 워싱턴 국회의사당 안으로 난입하고 있다. 이날 미 의회는 상·하원 합동회의를 열어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의 승리를 인증할 예정이었으나, 시위대가 의사당에 난입해 6시간 동안 중단됐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2021년 1월6일 오후(현지시각) 워싱턴 국회의사당 안으로 난입하고 있다. 이날 미 의회는 상·하원 합동회의를 열어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의 승리를 인증할 예정이었으나, 시위대가 의사당에 난입해 6시간 동안 중단됐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6월27일 프랑스에서 17살 소년이 경찰의 총에 사망했다. 항의 시위는 전국적인 약탈과 방화로 번졌고, 경찰의 진압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을 대표하는 두 노조가 성명을 발표하고 만약 정부가 “야만인 무리” 진압에 필요한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을 경우 경찰이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찰 강경파가 정부를 거슬러 행동할 수 있다고 위협한 것이다. 이는 프랑스 국가 권력의 구조에 생긴 균열을 보여준다.

좌파라면 폭력 시위는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문제에 대한 반응이므로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은 경찰 탄압이 아니라 사회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해결책은 추상적인 수준에서는 지극히 맞는 말이지만, 이번 사태의 해결책으로는 문제적이다. 프랑스 시위대는 저소득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시내버스를 공격했는데, 이는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지탱하는 시설을 파괴하는 행위이자,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격일 뿐이다.

대중 시위가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혁명이나 이란 시위처럼 해방적 비전을 지닐 때 그것은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이나 미국의 반인종주의 운동처럼 폭력적 행동의 위협을 정치적 해결에 잘 활용한 경우도 있다. 이번 프랑스 시위의 경우는 다르다. 법과 질서를 빨리 회복하지 않으면 진보적 결과를 가져오는 대신 극우 지도자 마린 르펜을 다음 대통령으로 당선시킬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르펜’이 이미 집권하고 있다.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모스크바 진격은 우스꽝스럽게 진행되었다.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졌고, 반란은 36시간 만에 끝났다. 프리고진이 정말로 러시아 권력을 전복하려 했던 것이었는지, 또는 프리고진 자신의 주장처럼 그저 부당함에 대한 항의를 표현하려 했던 것이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 내부 엘리트의 여러 파벌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이 과정은 외부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정확한 사정이 어떻든 러시아라는 국가가 사설 용병 회사를 더러운 거래의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은 이 나라가 ‘실패국가’(failed state)라는 징후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이제 실패국가는 소말리아나 파키스탄 같은 나라들만이 아니다. 국가 권력의 균열, 이데올로기적 내전, 공공장소에서의 안전 악화로 실패국가를 결정한다면, 그 목록에는 프랑스, 러시아, 영국, 미국도 추가되어야 한다. 이런 추세 속에서 좌파는 용기를 내어 법과 질서라는 슬로건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음울하지만, 폭력적인 혁명 군중이 권좌를 장악한 최근의 유일한 사례는 2021년 1월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국 의사당 습격 사건이다. 당시 자유주의 좌파는 이른바 ‘평범한’ 이들이 국가 주권의 정점에 침입하여 공적 삶의 규칙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킨 것을 보며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좌파가 하지 못하고 있는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을 포퓰리즘 우파가 권좌에 대한 대중 공격을 통해 성취한 것일까?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부패한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의회 선거와 강경 우파가 지배하는 봉기 중 하나뿐일까?

우리가 접어든 이 기묘한 국면의 시대에 좌파는 평범한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에 추가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공공장소의 안전이 약화하는 징후가 뚜렷한 상황에서도, 좌파는 이런 현상을 언급하기만 해도 반동적이라고 몰아붙이고는 실업이나 인종주의와 같은 ‘근본적인 사회적 뿌리’를 살펴봐야 한다는 입장만을 반복한다.

계속해서 ‘공공 안전’이라는 문제를 외면하는 일은 불만이라는 중요한 영역을 적에게 양보함으로써 사람들을 오른쪽으로 향하게 만드는 일이다. 안전하지 않은 일상 때문에 더 큰 해를 입는 이들은 자신들의 안락한 사회 속에서 평온하게 사는 부유한 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번역 김박수연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한국=현금인출기” 돌아온 트럼프, 앞으로 어떻게 되나 [뉴스 뷰리핑] 1.

“한국=현금인출기” 돌아온 트럼프, 앞으로 어떻게 되나 [뉴스 뷰리핑]

삼성전자 위기론을 경계한다 [뉴스룸에서] 2.

삼성전자 위기론을 경계한다 [뉴스룸에서]

[사설] “이런 대통령 처음 봤다”, 이젠 더 이상 기대가 없다 3.

[사설] “이런 대통령 처음 봤다”, 이젠 더 이상 기대가 없다

[사설] ‘김건희 특검법’이 정치선동이라는 윤 대통령 4.

[사설] ‘김건희 특검법’이 정치선동이라는 윤 대통령

녹취로 몰락한 닉슨 미 대통령 5.

녹취로 몰락한 닉슨 미 대통령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