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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대화와 협상을 가짜평화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김연철 칼럼]

등록 2023-07-09 19:22수정 2023-07-10 02:39

주변국은 현상 유지를 선호한다. 평화협정이라는 ‘법적인 평화’는 4자 사이의 포괄협정으로 이루어지더라도, 평화체제라는 ‘사실상의 평화’는 군사적 신뢰 구축의 당사자인 남북한이 합의하고 이행해야 한다. 불안정한 정전체제가 지속되면 한반도는 ‘강대국 정치’가 충돌하는 지정학적 비극의 무대일 뿐이다.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행동 회원들이 지난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를 규탄하는 내용이 담긴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행동 회원들이 지난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를 규탄하는 내용이 담긴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남북한은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서로에 대한 무력의 사용을 포기하고, 모든 분야에서 관계를 정상화하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누가 한 말일까? 반국가 세력이 아니라, 바로 보수 중의 보수, 노태우 대통령이 1991년 9월 유엔 총회에서 한 연설이다. 이 연설에서 그는 “남북한은 군사적 신뢰 구축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군비 감축을 추진”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전세계가 지켜보는 외교 무대에서 평화협정을 제안한 지 32년이 흘렀는데, 웬 반국가 세력 타령인가?

“새로운 항구적 평화체제를 추구하는 것은 남북한이 주도해야 한다.”

누가 한 말일까? 보수 여당의 뿌리인 김영삼 대통령이 1996년 4월 제주에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공동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당시 제주 선언에서 한·미 양국은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남북한과 미·중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안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여론에 민감해하고 남북관계를 국내 정치에 활용했지만, 최소한 평화에 관한 시대적 소명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4자회담은 1997년부터 6차례 본회담이 열렸다. 평화체제에 관한 한·미 양국의 합의 역사가 아주 길다.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으로 가는 징검다리다. 종전선언과 관련해 문재인 정부는 실질적 조치를 포함해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과 비핵화의 속도와 연계해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 사이에서 미국의 주장에 훨씬 가까웠다. 한·미 양국의 합의를 중시했기 때문에, 유엔사의 기능 변화를 포함하는 정전체제 변경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연히 북한의 입장과 달랐고, 그래서 성과도 없었다. 종전선언을 친북으로 보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는 모든 외교안보 정책에서 ‘평화’를 지웠다. ‘단군 이래’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다. 북한은 핵무장을 계속하고, 남북관계의 악화도 장기화하고, 미-중 관계도 어려운 상황에서, 가까운 미래에 협상의 재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나 김영삼 정부가 남북관계가 좋아서 평화체제를 제안한 것이 아니다. 전쟁을 겪은 한반도에서 평화는 시대의 과제이고, 헌법정신이며, 다수 국민의 공감대이다. 일부 극우세력을 제외하고 누가 전쟁을 바라겠는가? 평화를 만들 의지가 없으면, 당연히 평화를 지키기도 어렵다. 이미 겪었던 비극을 왜 되풀이하겠다는 것인가?

평화체제를 포기하면 북핵 문제는 어떻게 되나? 지난 30년 동안 평화체제 논의는 북핵 협상의 틀에서 이루어졌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안전보장을 제공해야 하는데, 그 핵심이 관계 정상화와 평화체제이기 때문이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부터, 2005년 9·19 공동선언, 2018년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내용이다. 평화체제를 포기하면, 당연히 대화와 협상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도 사라진다. 남는 것은 군비경쟁이고, 핵전쟁의 공포뿐이다.

평화체제 논의의 핵심 당사자인 한국이 포기하면 주변국 아무도 정전체제의 현상 변경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주변국은 현상 유지를 선호한다. 평화협정이라는 ‘법적인 평화’는 4자 사이의 포괄협정으로 이루어지더라도, 평화체제라는 ‘사실상의 평화’는 군사적 신뢰 구축의 당사자인 남북한이 합의하고 이행해야 한다. 불안정한 정전체제가 지속되면 한반도는 ‘강대국 정치’가 충돌하는 지정학적 비극의 무대일 뿐이다.

외교의 문을 닫고, 협상으로 가는 다리를 끊고, 전쟁의 담론만 넘쳐난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칼싸움하던 시대의 격언은 핵무장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대화와 협상을 가짜 평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전쟁이다. 그러나 폭력은 평화가 아니다. 평화는 평화적 수단으로만 지속 가능하다. 나아가 평화는 정쟁의 대상이 아니다. 시민들은 일상의 평화에 익숙해서 평화의 존재를 잊곤 하지만, 평화가 위협받으면 달라진다. 여론은 이중적이다. 정세를 악화시키는 북한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지만, 동시에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정부의 책임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과거 선거에서 색깔론이 일으킨 북풍이 언제나 역풍으로 작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국민이 훨씬 지혜롭기 때문이다.

종전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전쟁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정전에 합의한 지 70년을 맞는 7월에 평화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평화는 전쟁이 아니다. 여야를 불문하고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노태우 대통령의 1989년 유엔 총회 연설을 들려주고 싶다. “한반도에서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드는 날, 세계에는 확실한 평화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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