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김원철 | 사회부장
판결 직후 벌어진 일은 이례적이었습니다. 지난달 15일 대법원이 불법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참가 주체들의 역할과 책임에 따라 달리 봐야 한다고 판결하자 국민의힘과 재계는 말 그대로 ‘들고’일어났습니다. 자신들이 격렬히 반대하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의 입법 취지와 판결 취지가 비슷했기 때문이죠.
이들은 판결 비판을 넘어 대법관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했습니다. 급기야 대법원은 입장문을 내어 “재판부에 부당한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항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의 소동은 그런 항의를 넘어 ‘이런 판결을, 이런 대법원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전포고로 느껴졌습니다. 실제 그들에게 그런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법관 14명 중 13명을, 헌법재판관은 9명 전원을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5년 동안 새로 임명합니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제청권은 임명권의 선택지를 좁힐 수 있다는 점에서 언뜻 막강해 보입니다. 실제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한 이용훈 대법원장은 이명박 대통령 시절 제청권을 활용해 이 대통령이 껄끄러워하던 이상훈 법원행정처 차장의 대법관 임명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늘 제청권과 임명권이 갈등 관계인 건 아닙니다. 윤 대통령이 임명할 13명 중 3명의 대법관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명한 김명수 대법원장이 이미 제청했는데, 윤 대통령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지난해 7월 제청한 오석준 제주지방법원장은 윤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인물이었습니다. 지난달 두번째, 세번째 인물을 제청할 땐 윤 대통령 의중에 없는 인물을 제청하려 했으나 결국 뜻을 접었다는 게 중론입니다. 오는 9월 윤 대통령이 새 대법원장을 임명하면 이런 대법원장의 제청권마저 힘을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헌법재판관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9명 중 3명은 대통령이 직접 선택하고 임명합니다. 3명은 국회에서 선출한 인사를, 3명은 대법원장이 지명한 사람을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대법원장 몫 중 2자리는 지난 4월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명권을 행사해 윤 대통령이 임명했습니다. 이제 7자리 남았습니다. 윤 대통령은 자신 몫 3자리, 자신이 임명한 대법원장이 지명할 1자리, 국회 몫 3자리 중 1~2자리를 자기 뜻대로 임명할 수 있을 겁니다.
대통령 선거는 최고법원을 어떤 인물로 꾸릴지를 두고 각 정파가 겨루는 한판 승부입니다. 보수세력은 지난해 대선에서 승리했고, 차곡차곡 최고법관들의 면면을 바꿔나갈 것입니다. 대법관과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은 임명 시 국회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부결 사례는 극히 드뭅니다. 헌법재판관은 국회 동의도 필요 없습니다.
미국은 먼저 온 미래일지 모릅니다. 미국 대법원은 지난달 29일 대학 입학 시 소수인종 배려를 위한 ‘적극적 차별시정조처’(어퍼머티브 액션)가 위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흑인과 라틴아메리카계에게 유리한 제도는 백인과 아시아계에게는 불리하므로 수정헌법 제14조의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 규정에 위배된다고 밝혔습니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서비스 차별을 금지한 콜로라도주 법률도 위헌 판단을 받았습니다. 1년 전엔 임신중지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49년 만에 무효화했고, 공공장소 총기 휴대를 금지한 뉴욕주 법률을 위헌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트럼프의 유산입니다. 그는 대통령 시절 확고한 보수 성향 대법관 3명을 임명했습니다. 이후 미 연방대법원 구도는 ‘보수 절대 우위’인 6 대 3으로 굳어졌습니다. 트럼프는 떠났지만, ‘트럼프’는 남은 셈입니다.
오는 11, 12일 국회에서 권영준·서경환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열립니다. 윤 대통령이 임명권을 행사할 두번째, 세번째 대법관이 될 후보들입니다. 이후 윤 대통령은 유남석 헌법재판소 소장의 후임을 오는 11월 직접 선택하고 임명합니다. 내년에는 더 많은 대법관, 헌법재판관들이 새로 임명됩니다. 윤 대통령의 진짜 시간이 이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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