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용병집단 바그너그룹 소속 전사들이 지난 24일(현지시각) 탱크를 동원해 러시아 남서부 국경 인근 도시 로스토프나도누의 거리를 점령하고 있다. 로스토프나도누/AP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종대 |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용병의 전쟁’이다. 지난 주말 러시아 서쪽 지역을 휘젓고 다닌 바그너그룹은 자신들이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는 무장조직이며, 정치적 주체라는 점을 입증했다. 전쟁법에 구애받지 않고 한계를 초월하는 잔혹성을 과시하는 이들의 전투력은 러시아 정규군을 압도했다.
바그너그룹은 지난해 우크라이나 동부 바흐무트를 함락한 이후 러시아에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한 전쟁 영웅으로 등극했다. 오래전부터 이들은 러시아 국영 에너지기업인 가스프롬의 하청업체로부터 유입되는 자금과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확보한 이권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폭력의 공급망을 구축해왔다. 대중매체와 인터넷에도 능숙해 2020년 말 미국 대통령 선거에도 개입했다. 군사작전만이 아니라 여론전, 사이버전, 이념전, 생화학전 수행 능력도 갖췄다.
바그너그룹만이 아니다. 3만명 병력을 확보한 카디로프,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의 사설 조직인 파트리오트, 전 바그너 사령관이 독립해 만든 콘보이 등 사설 군벌이 난립하는 전성기다. 러시아 언론인 렘추코프는 지난해 영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이번 전쟁에서 승리나 패배가 아니라 사설 중무장 조직의 난립이 더 중요”하다며 앞으로 “모두가 무장한 파벌 간의 투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치학자 안드레이 피온트콥스키는 이를 “군사적 봉건주의”라고 부른다. 정부가 실패해 군벌이 난립하는 중세적 질서가 온다는 이야기다. 러시아 마피아 두목인 그리샤 모스콥스키도 언론 인터뷰를 자청해 “바그너와 카디로프라는 두개의 무시무시한 갱단이 탄생했다”고 탄식했다.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사설 무장조직의 난립은 러시아의 국가 실패를 드러내지만 이런 현상은 미국과 서방도 예외가 아니다. 정규군이 아니라 기업이 전쟁을 주도한다는 점에선 서구가 더 심각했다. 지난해 러시아의 소셜미디어 계정에서 인물 사진 약 1억장을 확보한 미국의 클리어뷰라는 안면인식 기술 업체는 우크라이나에서 중요한 작전을 수행했다. 심하게 훼손된 러시아 병사의 주검 사진을 검색창에 입력하면 수분 만에 95% 이상 정확도로 그 신원을 알아내고, 이 정보를 세계에서 의용군으로 모집된 우크라이나 정보군에 전달한다. 이들은 러시아 사회망에 침투해 러시아 정부보다 먼저 친지와 가족에게 병사 사망 사실을 전하며 우크라이나 정부에 주검 인도를 신청하도록 안내한다.
이 전쟁에서 국가와 군대의 통신망을 제공한 일론 머스크의 스타링크, 군수와 물류를 책임진 우버 택시, 사이버전을 수행한 마이크로소프트 등 기업들은 미국 정부가 포기한 전쟁 초기부터 사실상 모든 전투의 양상을 지배했다. 정부 군사위성을 성능과 양적인 면에서 압도한 사설 위성업체들은 러시아군의 동향을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그 과정에서 선전포고나 의회의 동의라는 공적 절차는 필요 없다. 국가의 권위 바깥에서 기업의 전쟁이 먼저 있었고, 미국과 나토(NATO)는 그다음에야 행동했다. 일론 머스크는 이미 기업인의 한계를 초월해 직접 종전협정을 제안하는 등 외교관이자 국제전략가의 위치에 올랐다.
최근 시진핑 중국 주석은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를 만나 “나의 첫번째 미국 친구”라고 치켜세우며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며칠 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을 불러서는 말석에 앉힌 장면과 비교한다면, 빌 게이츠는 국가 수반급이다. 중국도 독립된 행위자로서 빅테크 기업을 인식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지난 24일(현지시각)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바그너 그룹의 무장 반란에 대한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서구 언론들은 일제히 사설 용병기업을 통제하는 데 실패한 푸틴의 정치적 위기를 거론한다. 그렇다면 이제 미국은 사설 기업의 전쟁을 통제하고 있는가 질문할 차례다. 빅테크 기업의 방대한 데이터와 인공지능(AI)을 정부의 정책과 제도로 통제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지 오래다. 이들 기업은 오래전부터 “정부의 규제로부터 해방”이라는 자유의 복음을 전파해왔다. 게다가 사설 군사기업의 원조는 러시아가 아니라 이라크 전쟁에서의 미국이었다. 테러와의 전쟁 이후 세계 사설 군사기업이 창출한 경제 규모는 2018년 기준 3500억달러로, 현재 한국 국방비 규모의 7배다.
국가와 정부의 기능이 쇠퇴하고 강력한 기업이 통치하게 될 세상, 이것이 미래다. 러시아 푸틴의 실패만이 아니라 현대 정부들의 실패다. 우리는 과연 그들의 지배에 적응할 준비가 돼 있는가.